사진작가 강용석<동두천 기념사진>서 <한국전쟁기념비>까지 6.25 상처와 흔적 주제로 작업"전쟁기념비는 한국독재 정권의 징표들"… 2010 동강사진상 수상도

올해 들어 강용석 작가만큼 새삼스럽게 조명된 사진작가도 없다. 한국전쟁 60주년이기 때문이다.

미군기지촌에서 미군과 한국 여성 커플을 찍은 <동두천 기념사진>에서부터 미군 사격장으로 쓰인 매향리와 민통선 근처 '선전촌'을 담은 일련의 사진 연작들, 전국의 전쟁기념비를 풍물처럼 포착한 최근 작업 <한국전쟁기념비>까지 그의 카메라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한국전쟁의 잔여를 통과해 왔다.

"강용석 작가는 25년 이상을 6.25 전쟁이 한국사회에 남긴 상처와 흔적을 주제로 꾸준히 작업을 해 왔다. 그의 시선과 관심은 항상 예외 없이 6.25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분단과 대치가 바꾼 우리의 삶, 미군의 주둔으로 형성된 우리의 풍경 그리고 전쟁에 기생하는 권력의 작동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박주석 명지대학교 사진학과 교수의 평이 그 궤적을 잘 요약한다.

강용석 작가의 사진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이 왜 '역사적' 비극인지 설명하는 데 뛰어나다. 한국전쟁의 영향은 한 세대에 그치지 않았고, 권력에 의해 되살려지며, 뿌리내려 이어졌고, 전쟁과 가장 멀어 보이는 곳에서까지 시치미 뚝 떼고 가동되는 중이라는 점을 정직하고 환하게 비춘다.

<한국전쟁기념비>를 예로 들어보자. 진격하는 군인들, 험상궂은 전투 기계 등 한국 사람이라면 눈 감고도 떠올릴 수 있어서 정작 눈을 두게 되지 않는 전쟁기념비를 둘러싼 풍경이다. 저 상투적인 '전쟁'이 낡고 잊힌 와중에 사람들은 제각각 산다. 주변의 풀을 베고, 한적히 데이트를 하고, 기념비 그늘에서 햇볕을 피한다. 대비가 인상 깊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기념비의 격렬함과 일상의 아무렇지 않음 사이의 긴장이 눈을 붙든다. 기념비를 흉내 내어 총싸움 놀이를 하는 소년들에 초점을 맞추고, 대포가 멀찌감치 쉬고 있는 사람을 겨냥한 것처럼 보이는 각도에서 촬영하는 등 프레임을 치밀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기념비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군사독재정권이 체제를 뒷받침하는 도구로써 만든 것이다. 사진마다 전쟁에 대한, 아니 한국의 역사와 사회 속에 전쟁이 놓인 자리에 대한 복합적인 이야기들이 속속 떠오른다.

이런 작업들은 사진작가가 누구보다도 '잘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무심한 표면에서 왁자한 지층을 보는 사람, 본대로 현상을 드러내는 사람. 흔하디흔한 카메라와 스펙터클에 현혹된 우리의 눈이 점점 보기 이전에 반응하는 지금, 이런 눈이야말로 기념할 만한 것이 되었다.

강용석 작가의 사진이 "분단 상황을 긴급한 사태로 인식하지 않는 나태하고 안이한 일반의 인식에 일침을 놓는 것"(박평종 사진평론가)이라거나 "권력이 만든 누구나 인정하는 기념할만한 역사적 사건의 기념물(한국전쟁기념비)의 권위를 해체하는 식으로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실감각을 각성시킨다"(박주석 교수)는 평을 듣는 이유다. 23일부터 열리는 '2010동강국제사진제'는 강용석 작가에게 올해의 동강사진상을 안겼다.

지난 14일 만난 강용석 작가는 "사진을 하기 위한 신념"에 대해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작업을 하기 위해 동두천으로 "가출"해 1년을 살았던 그에게 보고자 하는 의지는 보는 능력의 근거 같았다.

<한국전쟁기념비> 중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 대전보훈공원' (2007)
작업의 주제가 한국전쟁으로 수렴되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의도했다기보다 그렇게 해석되는 것 같아요. 올해 한국전쟁 60주년이라 그 점이 더 부각되기도 했고요. 저는 사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닙니다. 잘 몰라요. 대학 재학 때 <동두천 기념사진> 찍기 시작한 것도 한국전쟁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 '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야 하나'라는 의문에서였어요. 미군이 주둔하면서 생겨난 불균형('언발란스')들이 있잖아요. 미군기지촌에서의 미군과 한국 여성 간의 관계가 그 점을 축약해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다른 미군기지촌도 있었을 텐데, 동두천을 선택하신 이유는요?

-여러 미군기지촌을 돌아다녀봤는데 동두천이 감각적으로 강렬하게 와 닿았어요. 동두천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가장 시골이었어요. 허허벌판 논밭 옆에 판잣집 같은 술집들이 다였죠. 그러니까 굉장히 낯설죠. 거리가 2km 정도 되었는데 위 1km는 흑인 동네, 아래 1km는 백인 동네로 나뉘어져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불균형이 보이는 거예요. 한국인에게 미국은 우호국이고 동경의 대상이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미군들의 모습도, 그들을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도 으레 알던 것과 다른 거예요. 특히 한국여성들은 당장 돈을 벌기 위해 여기서 일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미군과 계약결혼을 해 미국으로 가고 싶은 꿈 때문에 온 거죠. 그게 한국이 미국을 바라보는 방식 같다는 느낌을 받았죠.

최근 작업인 <한국전쟁기념비> 연작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한국전쟁기념비> 중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현충탑' (2007)
-이전 작업들이 비교적 외부적 시선으로 한국전쟁에 접근했다면, 이 작업은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전쟁기념비는 한국 독재정권 시절의 증표들이죠. 반공 교육을 하고 냉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사회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등, 전쟁을 정치적으로 이용했잖아요. 특히 박정희 정권 때 전쟁기념비를 굉장히 많이 세웠어요. 그런데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화되고 다른 곳들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기념비가 있는 지역이 점점 중심에서 밀려났어요. 의미도 많이 사라졌고요. 그 속성이 굉장히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기념비들과 그것을 보고 있는 현재의 시각 간의 괴리를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동두천 기념사진> 이후에 쭉 흑백사진 작업을 해 오신 이유는요?

-애초 사진 시작할 때부터 흑백사진에 관심이 많았어요. <동두천 기념사진>은 말 그대로 미군과 한국여성의 기념사진이라 그들에게 팔아야 했기 때문에 유일하게 컬러로 작업했죠. 저의 작업에는 흑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요. 사진뿐 아니라 어떤 매체든, 매체의 형식성이 주는 의미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매향리 풍경> 연작은 굉장히 '플랫'해요. 피사체, 대상과 거리두기를 의도하는 전략이죠. 제 사진의 대부분이 그런 특징을 기반으로 해요.

어떤 작업은 인상사진, 어떤 작업은 풍경사진 혹은 풍물사진처럼 보입니다. 이런 '형식'은 작업의 소재에 따라 다르게 취하시는 건가요?

-<민통선 풍경>은 민통선 부근 '선전촌'을 찍은 연작이에요. 1973년 박정희 정권 때 전국에서 신원이 확실한 젊은 부부를 대상으로 입주자를 모집해 논밭을 주고 만든 마을이죠. 북한에서 보이는 곳이라 남한이 이렇게 잘 산다고 선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인심이 사나웠어요.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라 중구난방 파가 갈려서 알력 다툼이 심하죠. 누가 이장이 되느냐에 따라 마을 정책이 바뀔 정도니까, 취재하기가 쉽지 않아요.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저도 사진 찍으며 많이 거부당했어요. 노태우 정권 들어서는 여기 땅 문서가 있었던 사람들에게 재산권을 인정해주는 바람에 입주자와 소유주 간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게 주민들이 젊을 때 여기에서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라 떠나지를 못해요. 갈 데가 없는 거죠. 여기서 작업할 땐 가족사진 형식으로 찍었어요. 어떻게든 찍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기도 했고, 가족사진의 의미도 포함되었죠. 이렇게 매 작업마다 형식을 조금씩 바꿔갔어요.

돌아봤을 때 아쉬움이 남는 작업은 없으세요?

-그런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아요. 사진은 내가 현장에 갔을 때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는 부분이 많죠. 그래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하지 않으면 안 돼요.

사진학과 교수이신데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시는 점은 뭔가요.

-다큐멘터리 사진을 가르치는데 사진을 하기 위한 신념을 강조하는 편이에요. 어떤 철학으로 사진을 할 것인가를 중심에 세우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즘 다큐멘터리 사진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오랫동안 지탱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예전에는 어려워도 사진을 했는데, 지금은 어려우면 사진 안 하거든요. 모든 것을 화폐 가치로 바꿔 생각하고. 학생들과 그런 부분을 밀고 당기기하죠.

작가님의 신념을 지탱해주는 건 뭔가요.

-예전에는 사진을 함으로써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내 삶을 드러내기 위해 사진을 하는 것 같아요. 내 관심이 내가 표현하는 사진으로 귀결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삶보다 사진을 우선하는 객기를 좀 줄이려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가 사진을 시작할 땐 그런 객기가 많았는데(웃음) 사진을 위해 산다는 객기를 줄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다른 사람들도 설득시킬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