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가 밝넝쿨열 개의 시골마을서 '텐 빌리지 프로젝트' 펄쳐, 춤으로 하나 되는 '행복 에너지' 전해

흰 가발을 쓴 흑인 남자가 음악과 한 몸이 되어 그루브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마치 짐승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몸을 구경꾼들은 넋을 잃고 바라본다.

음악이 끝나고 그가 퇴장하자 이번엔 동양인 남자가 한쪽에서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칠었던 앞의 춤에 비해 그의 춤은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다.

하지만 우열을 가릴 순 없다. 각각의 춤은 각자의 개성을 뿜어내며 구경꾼의 박수를 이끌어낸다.

베네수엘라, 모잠비크, 한국 등 글로벌한 댄서들이 함께 춤을 춘 이 장소는 서울의 LIG 아트홀. 이날 모인 구경꾼들은 춤을 '좀 아는' 관객들인데다, 개중엔 유명 무용가들도 몇몇 보였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좋은 춤은 좋은 관객과 이상적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연이 춤에 대한 일면식도 없는 시골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상상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현대무용가 밝넝쿨의 <텐 빌리지 프로젝트>가 전국의 면단위에서 개최됐다. 이번 공연은 '진정한 나눔'을 실천하는 무용가들의 영혼을 담아 춤예술의 존재 이유, 삶의 고귀함을 드러낸 데 의의가 있다.
지난 15일부터 현대무용가 밝넝쿨은 도시의 공연장이 아닌 열 개의 시골 마을을 찾아 6일 동안 연달아 춤을 췄다. 이른바 '텐 빌리지 프로젝트(10 Villages Project)'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안무가 다비드 잠브라노(David Zambrano)가 50세 생일을 맞아 5개국 50개 마을을 돌며 춤을 춘다는 '피프티(50) 빌리지 프로젝트'의 일부다.

3년 전 비엔나의 임펄스 탄츠 페스티벌에서 잠브라노와 인연을 맺었던 밝넝쿨은 올해 코스타리카에서 시작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원래 일정에는 없었지만 잠브라노에게 세 번째 투어 나라로 한국을 제안한 것도 그다. 짧은 기간 동안 10개의 지역을 다 돌 수 있는 일정을 짜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 결과 군산시 대하면 공연을 시작으로 전주, 영광, 당진, 예산, 부여, 오산, 청주 지역을 거치는 '종단' 일정이 짜여졌다. 공연에 앞서 남은 일은 대관 신청이 아니었다.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사실상 게릴라 퍼포먼스에 가까운 계획이었기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시작한 한국 투어. 무대가 아닌 시장 한복판에서, 그것도 농약을 뿌리거나 고추를 따다 온 마을사람들 앞에서 추는 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생뚱맞거나 낯선 느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밝넝쿨의 대답은 '익숙했다'였다. 이미 해외에서도 경험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순간은 춤이 '살아있음(live)'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죠."

다비드 잠브라노와 밝넝쿨이 다른 두 명의 무용가들과 함께 춘 춤들은 '안무된' 춤이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그때그때 '부름을 받은' 무용가가 알아서 나오는 것이다. '필' 받은 대로 즉흥적으로 추기 때문에 그 모습도 매번 다르다.

하지만 즉흥춤이 아무렇게나 추는 춤은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음악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춤이다. 이런 춤을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도심의 한복판에서 춘다면 반향이 대단할 테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원칙에서 도시는 애당초 제외됐다. 이번에는 도시가 문화 소외지역이 된 셈이다.

춤이 즉흥이니 음악이나 춤추는 순서도 '랜덤'이다. 안무가 없는 춤엔 관념이 끼어들 여지도 없다. 그리고 밝넝쿨은 그것이 바로 텐 빌리지 프로젝트가 노린 것이라고 말한다. "소위 '무용'이라고 하는 것들은 온갖 상징이나 관념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잖아요. 이번에 우리는 주민들에게 춤을 '이해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그냥 '느끼게' 해줬죠. 그래서 이 춤은 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래야 우리와 공유할 수 있었거든요."

그 결과, 사람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밝넝쿨은 사람들이 소울이라는 낯선 음악과 제3세계의 의상 등에 낯설어할까봐 솔직히 불안했었지만, 첫 번째 춤이 끝날 때쯤엔 이미 무용가들과 어우러져 있더라며 놀라워한다. "코스타리카에서 췄을 때도 느꼈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처럼 대체로 삶 속에 춤이 있는 나라들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그런 면이 있지만 드러내기 어려웠는데, 이번 공연에선 무용가로 사는 게 너무 고맙고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했어요."

이런 느낌은 밝넝쿨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투어 일정 중 하나인 전남 영광의 밝넝쿨 모교에서의 공연은 무용가들 모두가 앞서의 코스타리카와 세네갈 공연까지 포함해 가장 뜨거운 반응으로 꼽았다. 다비드 잠브라노는 문화나 인종, 국적과 같은 '명찰'을 떼면, 그 순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날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춤의 원초적인 힘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프로젝트를 마친 밝넝쿨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춤을 췄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세계에서 모인 무용가들이 사람들과 춤을 나눈 그 순간들이 중요하고, 앞으로도 그런 춤을 계속할 이 프로젝트가 소중하다고 말한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세계지도를 펴서 50개의 공연한 지역을 점으로 표시하면 비주얼한 도표가 그려지잖아요. 그 50개의 춤을 통해 '행복한 에너지'를 나눠주게 되는 거죠. 이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문화 소외지역에서 보여준 그들의 춤 퍼포먼스는 예술가의 사회 환원 활동으로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밝넝쿨과 그의 동반자들은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문화 소외지역에서의 춤 나누기'로만 보는 시선에는 거부의 뜻을 나타낸다. 관행적인 문화나눔 행사의 성격보다는, 본질적으로 춤의 유전자를 일깨우는 작업이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밝넝쿨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언젠가는 누군가가 반응하지 않을까요. 내가 한 번 더 할 수도 있고, 다른 무용가가, 다른 장르의 예술가가, 혹은 농부가 할 수도 있겠죠"라며 여기서 받은 영감들이 언젠가는 그 결실을 맺게 되길 기대했다.

한국에서의 텐 빌리지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 다비드 잠브라노는 "어쩌면 그 사람들은 평생 우리가 뭘 했는지 이해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그들이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네요"라고 말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마을 사람들이 무용가들과 그 순간을 느끼고 즐겼다면, 그게 바로 그들의 몸에 있는 춤의 유전자를 깨우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무용가들은 다음 투어를 위해 폴란드로 떠난다. 비록 그들과 동행은 못하지만 한국에 남은 밝넝쿨은 다시 그만의 춤으로 사람들의 춤 유전자를 깨우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