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소설가결핍과 상처, 배신과 겸딤의 서사 '빼곡', 내면을 정화하는 소통의 글

1. 소설가 김규나는 2000년대 작가들의 '발랄한 서사'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다. 매끄럽게 넘어가는 서사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 섬세한 인물 묘사는 첫 단편집이란 책의 겉표지를 자꾸 들추게 한다. 작가는 농익은 주제의식으로 현대 인간들의 소외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2. 단편 '내 남자의 꿈'이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칼'이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이름을 알렸다. 작가는 소설가가 되기 전, 영어 교사와 수필 작가로 활동했다.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2년 정도 드라마 대본 쓰기를 공부했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이지만, 작가의 이력을 아는 것은 얼치기 평자가 작품을 읽고 소개할 때 주효한 단서가 된다. 언젠가 작가는 삶의 어떤 계기를 맞던 순간, 문학이 자신을 구원해주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구원이란 말에 비추어 그 계기는 시련이나 상처 같다고 짐작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제 나름의 시련을 맞고, 작가란 그 개별적 상처를 인간의 보편적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존재이므로.

작가는 인터뷰에서 "수필로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다 할 수가 없어" 다른 장르를 쓰기 시작했고, "내가 감히 소설 쓴다는 생각은 하지 못해" 드라마 공부를 먼저 했다고 했다. 그리고 "드라마에는 아포리즘을 담을 수 없어" 다시 소설을 썼다. 그녀는 말했다.

"책을 읽을 때 밑줄 그으며 읽어요. 저도 독자에게 선물처럼 그런 문장을 주고 싶어요. 이야기도 재미 있되, 문장도 안겨 줄 수 있는 소설이죠."

재미 있는 서사와 책을 밑줄 긋게 만드는 아포리즘의 결합. 이것이 그녀가 쓰고 있고,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이다.

결핍의 시간들

그러니 그 소설은 요즘 소설계의 트렌드인 '발랄한 서사'나 '서사의 파괴' 같은 말보다 90년대 작가들의 '여성주의' 같은 말과 더 가깝다. 소설집 <칼>에는 결핍과 상처, 배신과 견딤의 서사들이 빼곡하게 담겨있다.

표제작이자 등단작인 단편 '칼'은 시체를 부검하는 여자인 '나'와 부검 대상으로 누워 있는 '당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독특한 소설이다. 개인적 상처로 부검의가 된 한 여자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음악가를 변사체로 만나는 상황을 그린다.

아내로부터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자는 자신을 부검하는 여의사와 나누는 내면의 대화를 독백조로 중계한다. 남자의 내장을 들어낼 때, 여의사는 그의 외로웠던 생애를 꺼내 읽는다. 드라마 를 떠올리게 하는 꼼꼼한 묘사와 2인칭 주인공시점이란 독특한 설정으로 주목받았다.

20대 초반 여성 화자를 앞세운 <퍼플레인> 역시 마찬가지. 열일곱에 나를 낳고 결혼을 세 번이나 한 '한국의 리즈테일러'(250페이지) 엄마는 영화배우로 성공했다.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나는 엄마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탈선하고,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연애를 한다.

나는 애인을 바꿀 때마다 그 애인의 이미지에 맞는 색깔로 머리를 염색한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염색을 바꾸면서 스쳐간 남자의 기억을 삭제해 버리는 나와는 달리 여자는 블랙홀처럼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기억을 흡수하는 것'(253페이지)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가벼운 풍선처럼 취급하지만, 각자 삶의 무게를 견뎌내면서 사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염색 진하게 한 청소년을 볼 때, 이 아이들은 인생에 고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죠. 근데 그 아이들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잖아요. 다만 자기 내면을 표현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몸으로라도 표현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이 아이(주인공 나)에게도 뭔가 동조하고 공감할 부분이 있고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 이야기라면, 가장 최근에 쓴 <북어>는 이와 궤도를 달리한다. K지역에서 슈퍼마켓을 차린 미금의 남편은 근처 운전면허 연습장이 대기업에 팔려 대형마트가 들어서며 빚만 잔뜩 쌓아둔 채 폐업을 선언한다.

집에 있는 남편을 보다 못해 미금은 대형마트 계산원으로 취직하고, 그 사이 남편은 춤바람이 난다. 자신의 현재를 보며 미금은 중얼거린다. '다시 봄이 올까?'(183페이지) 자신 아닌 또 다른 사랑에 상처받은 남편을 위해 미금은 북어를 손질하다가 지느러미와 가시에 손을 찔린다. 비록 지금은 뜨거운 여름이지만 가을, 겨울을 지나 또 다른 봄이 온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명태가 안 잡힌다고 하죠?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는 것,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곳.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막연히 우리 기억 언저리에 남은 향수에 대해서요."

소설집에는 이 밖에도 '달 컴포지션 7', '뿌따뽕빠리의 귀환', '코카스칵티를 위한 플롤로그' 등 11편의 작품이 수록됐다. 소설 속 인물들은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관계가 끊어지는 공통점이 있다. 결핍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더 절실하게 느끼는 법, 작가는 우리 시대 사랑을 섬세하게 묘파함으로써 시련과 상처, 결핍을 말한다. 작가는 "사랑을 통해서 삶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내면이) 비어있기 때문에 사랑을 찾고 사랑을 하면서 더 아파하고, 결국 원래의 결핍 상태로 돌아오죠. 그런데 저는 사랑 후에 찾아오는 결핍은 이전과 다른 '충만한 결핍'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한번쯤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만, 그 다음에 조금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타인의 슬픔으로 자신을 치유하는 건, 비극을 바라봄으로써 마음 속 응어리를 벗겨내고 내면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카타르시스에 관한 소설적 정의다. 작가는 그래서 소설을 읽고, 쓴다. '삶의 유한성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소통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280페이지) 지금 이곳에서.

'온갖 생존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있다. 때로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당신을 위로하는 것들 (…) 그 분주하고 촘촘한 시간 속에서 잠깐만이라도, 내가 쓴 글 한 줄이 당신의 심장을 따사롭게 어루만져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