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원용진 교수<대중 문화의 패러다임> 낸 후 15년 만에 <새로 쓴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 출간대중 문화 연구의 뜻 새로 정립, 사례 업그레이드,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보론 추가

"먼지 털어 세상에 다시 내놓기"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원용진 교수가 15년 전에 낸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을 다시 썼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중 문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불지핀 서태지의 시대가 저물고 IMF가 왔다 갔다.

월드컵과 촛불집회가 서울 한복판을 들었다 놓았다. 인터넷을 넘어 스마트폰이 퍼져 나가고 있으며 소년소녀들이 TV를 점령했다. 돈에 대한 욕망은 더 악착같아졌고, 직장에서 버티기는 더 고단해졌다. 그리고 "대중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촌스러워졌다."

각양각색 매체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발 빠른 정보와 간편한 해석은 긴 호흡의 진단과 전망을 무색하게 한다. "소녀그룹이 나와 맨다리에 춤이라도 추면 텔레비전 안으로 몸을 구겨 넣을 태세"인 한국사회에서 대중 문화를 분석해보자는 제안은 철 지난 잔소리로 추락했다.

이런 격변과 사면초가가 <새로 쓴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의 난관이자 의의다. 원용진 교수 자신에게도 그렇다. 90년대 중반 대중의 세련된 문화적 취향을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북돋운 학계의 대중 문화 연구가 결국 대중의 소비를 부풀리고 IMF 사태에 기여했다는 자책감은 '먼지를 터는' 데 6년이나 걸린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고민이 깊었던 만큼 속속들이 털었으며, 다시 채웠다. 동시대 대중 문화의 자리와 대중 문화 연구의 뜻을 새로 밝혔고, 사례를 업그레이드했다. 특히 현상을 따라 잡는 것을 넘어 문화적 바탕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는 최근 학계의 움직임을 반영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보론으로 추가했다.

책은 너무 쉽게 자주 불리는 바람에 오히려 그 뜻이 어리둥절해진 '대중 문화'를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새로 부르는 데서 출발한다. 대중 문화를 TV 드라마, 영화, 소녀시대 등 문화산업의 산물만이 아닌 "피지배 경험을 가진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자 이야깃거리는 한층 풍성해진다. 최장수 TV 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을 보는 눈으로 동성애자 연예인의 커밍아웃과 광화문 광장의 경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분석할 수 있다.

대중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고 만들어내자는 독려로 이어진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학문적 길들은 경전이기보다 도구로써 펼쳐지며 보기 드문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이는 원용진 교수가 10년간 문화연대에 몸 담고 연구와 행동을 병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90년대 중반 대중 문화 연구는 서구 이론을 수입해 한국 상황에 적용한 면이 있죠. 저도 아직 그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읽는 이가 자기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는 사례를 많이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대중 문화는 재미있는데 왜 이렇게 재미 없게 이야기해 왔을까, 라는 반성에서요.(웃음)"

원용진 교수는 요즘 연구는 물론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과 제언, 트위터 놀이, 거주지인 수원의 삭막한 데에서 벼룩시장을 열 궁리를 동시에 하고 있다. 그게 다 대중 문화의 지평이다.

"문화 연구도, 문화 운동도 총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해요. 현재 자본주의적 위기를 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야 하고요. 그러기 위해서 대중 문화에 대한 논의에도 인문학적 상상력, 예술적 지혜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대중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재미있을 이유다. 7월 27일 원용진 교수를 만났다.

15년 만에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을 새로 써내셨습니다. 감회도 새로울 텐데요.

그래서 머리말이 거의 회고록이 됐어요.(웃음) 15년 동안 무엇이 바뀌었을까, 나와 수용자들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예전 책을 본 독자들도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요.

문화연구자로서 부여하는 의의는 무엇인가요?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이 나왔을 때는 대중 문화 연구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인데 담론의 수준이 엷어져 버렸죠. 문화 연구자들이 나뉜 탓이 커요. 비자본주의적 삶을 꿈꾸는 한 부류는 아예 상업 문화에 등을 돌렸고, 대중 문화 연구를 열심히 한 부류는 어느 틈엔가 그 쪽과 한데 어울려 버렸어요. 대중추수주의 경향이 생긴 거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대화하려고 했던 90년대 중반의 분위기가 약화한 것 같아요. 그 열기를 어떻게 되살릴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당시에 대해서도 반성할 필요가 있죠. 서구에서 유행하는 담론을 수입해 따라간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 점이 아직 우리가 대중 문화를 대할 수 있는 태도, 한국적 상황을 볼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모색하지 못한 것과 관련됩니다.

대중 문화 수용자들도 많이 달라졌죠.

지금 제 책을 읽을 만한 대학생이 15년 전에는 유치원생이었으니까요.(웃음) 이 세대는 당시 젊은 세대보다 상업 문화의 세례를 훨씬 더 많이 받으며 자랐죠. 비판적 거리를 둔다는 말 자체가 낯설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학문적 담론, 비판적 담론이 수용자를 조심스럽게 찾아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왔어요.

새로 쓰기로 하신 후 6년이 지났다고 들었는데요.

그동안 많이 좌절했죠. 예전 책에서 얼마나 바꿀 것인가, 그럴 만한 내공이 있는 것일까 하면서요. 서구 담론을 끌어들인 후 그것을 더 두텁게 하거나, 체화했어야 하는데 잘 못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최근에야 후배 세대, 30~40대 연구자들의 책을 통해 대중 문화 연구에 진전이 있고, 새로운 가능성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어요. 특히 철학이나 문학 등 인문학 쪽에서 탄탄하고도 자연스럽게 쓴 대중 문화론이 나오고 있더라고요. 과학적 보편성을 내세우는 사회과학적 접근에서보다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고, 특히 개별적이거나 소외된 사람 이야기를 많이 담았어요. 그런 접근이 읽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정보도 더 많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책들을 보고 난 후 내 책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작업이 더 늦어졌습니다.(웃음)

학계가 말하는 대중은 좀 추상적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책에 대중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쓰셨습니다. 어떤 뜻인가요?

대중 문화를 통해 사회적 가능성을 찾으려면 대중의 능동성과 창조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부분은 연구자가 채워 넣은 개념이기도 하죠. 하지만 지금 대중이라고 쓸 때의 믿음은 15년 전 그것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당시엔 거의 무한한 믿음이었죠. 이전에 대중에 대한 폄하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자는 반발 심리가 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회의가 듭니다. 몇 번의 정치적, 경제적 변화, 사회 운동의 변화 속에서 대중의 자각이 필요했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대중 문화 연구와 운동이 대중과 함께 한다는 생각은 건강하지만 대중도 때론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더불어 하는 계몽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하는 계몽이라니요?

예를 들면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문화연대는 거주지를 갖고 산다는 게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시인과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일을 함께 했어요. 그것은 철거민들을 위한 운동이기도 했지만 아파트 평수 늘리는 욕망 중심으로 행동하는 시민들을 향한 발언이기도 했어요. 늘 힘 없는 대중, 무엇인가를 빼앗긴 대중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그 일환이고요.

믿음이 좌절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대중에 대해 실망했다기보다 대중을 믿었던 나에게 실망한 게 IMF 때입니다. 대중이 잘 하고 있다고 한 문화 연구 때문에 IMF가 생겼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김영삼 정부 이후 사회가 점점 더 빠르게 신자유주의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데 대중은 타인을 돌보기보다 딛고 일어서라는 경쟁 담론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화폐 교환으로 수렴되는 현상이 일어나며 비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꿈도 옅어지고 있고요. 너무 삭막해졌죠. 이 모든 변화에 대중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요? 문화 산업이 만들어내는 상업 문화가 아닌, 사회 변화를 제어하는 공공적 대중 문화, 비주류 대중 문화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책에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추가하셨습니다.

전작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을 작업하면서 한국의 미국화가 해방 이후 시작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제 시대부터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됐어요. 식민화와 미국화가 동시에 일어났죠. 해방 이후에는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는 이유로 미국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요. 한국의 문화적 터전이 이렇게 복잡한데 역사적으로 정리한 작업이 뚜렷이 없었어요. 요즘 거기에 관심을 갖는 연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예를 들면 1930~40년대 한국사회의 모더니티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기억과 경험이 우리 습속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가를 밝히는 거죠.

요즘 트위터를 열심히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트위터를 둘러싼 희망적 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는지요.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의 들썩임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터넷과 관련된 핵심 용어는 '협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협력이 안 되면 인터넷 공간이 망가지게 되어 있어요. 결국 어떻게 협력하게 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트위터는 구조적으로 비교적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협력하지 않으면 '블록'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한국의 트위터는 비교적 건강한 담론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선방을 날린' 것 같아요. 어떤 사회든 트위터의 모습은 처음에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 자리 잡았는가가 많이 좌우하잖아요. 거기서 재미있게 놀기 위해서는 그 모양에 협조하면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친한 사람들끼리 협조하는 상태고, 앞으로도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 영향력은 커질까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와서 배우고 간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다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이렇게 많으니 이번에는 투표하러 가야겠다 정도의 깨우침을 주죠. 때로는 내일 당장 세상이 바뀔지 모른다는 착각도 듭니다.(웃음) 그래서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중독성은 조심해야죠.

교수님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요?

모르는 게 있을 때 물어볼 수 있어요.(웃음) 어제도 '시로 철학하기', '소설로 철학하기' 처럼 'TV로 철학하기'가 가능할지 궁금해서 질문했더니 많이들 대답해 주었더라고요. TV는 사람들 시선을 너무 많이 끌어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어요.

TV를 그렇게까지 몰입하며 본다고요?

시청자가 찾아가며 볼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들어오면서 시청 패턴이 바뀐 것 같아요. TV가 점점 홀로 매체가 되어가고 있기도 하고요.

얼리 어답터신가요?

그렇지는 않은데 트위터와 블로그는 열심히 합니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요. 특히 학생들과 이야기하는 게 편해지더라고요.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는 꼭 블로그를 만들도록 합니다. 블로그는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장소라 거기에 글을 쓰다 보면 문장도 늘고, 사회를 생각하는 아량도 많아집니다.

요즘 대중 매체를 통한 문화 현상 중 주목하는 것이 있나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뜨거운 형제들'이라는 코너요. 일종의 포르노처럼 느껴져요. 숨김이 없거든요. 그게 현재 사회 상황의 전형인 것 같아요.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남자 아이돌을 보고 "골반이 멋있다"고 하잖아요. 예전엔 골반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기 힘들었는데 말이죠. 모든 걸 다 드러내는 시대고, 드러내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죠. 그러면서 드러내는 게 다 진솔하지는 않고요. '우리 결혼했어요'의 경우 출연자들이 진짜 부부처럼 행동하고 자신의 감정을 최선을 다해 이야기하지만, 진짜는 아니죠. 감정 노동이에요. 보다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해요. 비애감이 드는 거죠. 아이들은 연예인을 흉내내며 놀게 마련인데 저런 감정을 보면서 노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있나요?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무한도전>이에요. 사실 논문을 하나 쓰고 있어요.(웃음)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는 거죠. <무한도전>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테크놀로지에요. 예전에는 자막 하나 올리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지금은 쉬워졌거든요. 자막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된 거죠. 또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되는 노동량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동원되는 카메라만도 열 대가 넘어요. 이를테면 예전에는 400분 녹화분을 추려 40분 방송분을 만들었다면 지금은 2000분을 추려야 한단 뜻이죠. 그만큼 촬영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노동 강도가 높아졌습니다. 이건 방송에 국한된 일이 아니에요. 사회 전반의 상황과 관련된 거죠. 나아가 그렇게 만들어진 대중 문화가 출연자의 노동의 성격을 바꾸고 시청자에게 깔끔한 즐거움이 아닌 씁쓸함을 남기고 있다면 이 상황은 뭔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인가 싶은 겁니다. "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