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앙팡테리블] (75) 시인 신해욱두 번째 시집 <생물성> 새로운 시적 화자 등장 투명성 극대화

50년을 이 땅에서 살아온 누군가에게 한국어로 쏟아내는 랩은 가장 어려운 '우리말 듣기' 중 하나일 게다. 이 난해함은 익숙함을 배반한 데서 나온 불편이다.

2000년대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을 낸 시인들의 시에 대한 세간의 평(어렵다, 난해하다, 소통 불능이다)은 그런 불편에 기인한다.

이들은 새로운 감각의 세대이고 이전 서정시의 문법과 호흡에서 벗어난 말하기를 시도함으로써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은 세대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전 한국시들의 말하기 방식에서 벗어나는 걸까?

시인 신해욱의 두 번째 시집 <생물성>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새로움을 담고 있다. 지난해 본지 설문조사에서 평론가들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집이다. 이 시집의 첫 시를 옮긴다.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시 '축, 생일' 전문)

내가 누군가의 딸, 동생, 동료, 아내로 불리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인식되는 순간이 생일이다. 이 시적 화자는 내가 타자로 느껴지는 순간들에서 시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고 이를 집요하게 시로 옮긴다. 2000년대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이처럼 나(시적 화자)의 무수한 변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황병승이 '내 안의 무수한 나'로 분화된 화자들이 쏟아낸 말을 담아낸다면, 김행숙의 시에는 끊임없이 유동하는 화자가 등장한다. 이들에게 시인과 시적화자는 별개다. 신해욱이 2000년대 시의 특징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차이를 가지는 점은 새로운 시적 화자를 등장시키면서도 시 쓰는 자와 생활인 사이 어떤 장애물도 없이 투명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 신해욱.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간결한 배치>(2005)와 <생물성>(2009),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새로운 감성의 시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흔히 '시'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얘기하지만, 그 안에도 일종의 장르가 있는 거 아닐까요. 어떤 사람은 그 장르를 즐길 수 있겠고, 특별한 관심이 없는 어떤 사람은 그 장르를 '어렵게' 받아들일 테고요. 저는 그것이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지면상 가로로 눕혀 놓았지만, 그녀의 시는 행과 행, 연과 연 사이를 두고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시가 이렇게 시간과 인칭을 '투명하게' 넘나드는 건 행과 연 사이 아득한 여백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시인은 "길게 쉬고 다음 문장으로 가고 싶을 때 연갈이를 하는데, 길게 쉬다 보니 어떤 단절이나 빈 공간이 생기잖아요. 그 자리에 애매모호하게 고여 드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있어요"라고 했다. 그 애착이 빚어낸 또 한 시를 읽어 보자.

'실은 입은 점점 병들고 있는 중이었다.// 동시에 두 개의 말이 나오는데/ 나는 말의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빨에 힘을 줄 수도/ 턱을 움직여 음식물을 씹을 수도/ 없었다.// 광대뼈가 움직였다.//…// 얼굴이 없는 불행을 견디기엔/ 나는 너무 나약했다.' (표제작 '생물성' 부분)

화자는 우리시대 공통된 감수성, 상식, 이데올로기(얼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결핍되어 있고, 때문에 이 '얼굴 없는' 불행을 견뎌야 한다. 너무 나약한 화자는 그러나 우리시대 징후를 자신조차 '말의 방향을 짐작할 수'없는 상태로 한 줄, 한 줄 읊조린다. 2000년대 시의 또 한 징후는 첨예하게 미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고 싶다는 욕망을 그린다는 점이다. 그것은 80년대 참여시처럼 직설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녀의 곡진한 노래처럼.

새로운 감성의 시들은 이렇게 독자에게 시나브로 다가온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