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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임철우 "간이역처럼 스러져가는 사람들 이야기죠"

<이별하는 골짜기>발표… 삶은 두렵고 끔찍해도 맞서야 할 현실 일깨워
'임철우는 탁월한 서정 시인이다. 그가 쓰는 서정시는 슬픔, 아픔, 분노 등의 근원 정서와 관련을 맺고 있지만, 그 근원 정서가 생경한 부르짖음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의 근원 정서는 김승옥, 이청준, 서정인, 황석영, 조세희 등의 좋은 소설들처럼 단아하게 절제되어 있다.'

임철우의 소설 <아버지의 땅>(1984)에 붙인 문학평론가 김현의 해설('아름다운 무서운 세계')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소설질(이청준의 표현)을 시작한 초기에 쓴 작품이므로 30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해 그 모양과 기교가 같지는 않을 테지만, 한 인간이 품고 있는 세계관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현의 해설은 임철우의 작품을 살펴보는데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현은 이어 '그 절제를 가능하게 한 것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정황 속에서 인간은 고립된 개별자로서 타인들과 통로를 트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비극적 세계 인식'이라고 썼다.

수십 년이 지나 작가의 작품을 살펴보는 데도 이 비유는 여전히 적확하다. 이 비극적 세계인식은 <건>의 김승옥, <나주댁>의 서정인과 맞닿아 있고, <눈길>의 이청준, <삼포 가는 길>의 황석영,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등과 작가 임철우를 멀게 한다.

5‧18 (소설 <개도둑>, <동행>, <직선과 독가스>, <봄날>), 한국전쟁과 분단문제(소설 <그곳에 가고 싶다>, <등대 아래서 휘파람>, <붉은 산 흰 새>)등 굴곡진 현대사를 그려낸 그의 작품을 지배하는 정서는 투쟁적 의지보다 자폐적 고립감이다. 서정적 문체로 쓴 그의 소설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음에도 수월하게 읽힌다. 그의 작품이 황석영, 조세희보다 김승옥, 서정인과 가까운 이유다.

그가 단편 <개도둑>으로 등단한 때가 1981년이니, 이제 30년이 지났다. 슬픔과 분노의 정서로 쓴 서정시는 어떤 모양새로 변했나. 지난주 출간한 장편 <이별하는 골짜기>는 이 변화를 보여준다. 작가는 말했다.

"예전에는 뭔가 응어리가 있어서 토해내는 그런 긴박감이 있었는데, 이번 경우는 많이 담담하게, 상당히 가라앉은 상황에서 인물이나 이야기를 응시하려고 했다고 할까요? 그런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6년 만에 발표한 장편이다.

이별하는 골짜기

작가는 몇 해 전부터 횡성에 집필실을 두고 서울과 그곳을 오갔고, 그 과정에서 보게 된 간이역을 모티프로 이 소설을 썼다. 간이역의 이름이 별어곡(別於谷), 이별하는 골짜기였다고.

"(횡성에 집필실을 둔 이후에) 강원도 특히 정선, 영월 쪽을 많이 갔습니다. 그곳에 간이역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별어곡이란 역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역명이 참 특이했어요. 기억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소설은 간이역 별어곡을 배경으로 2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펼쳐진다. 이들의 내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부재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온 별어곡의 막내 역무원 정동수, 자신의 실수로 열차에 치어 죽은 남자의 아내와 결혼한 늙은 역무원 신태묵, 날마다 커다란 가방을 끌고 별어곡역을 찾아와 목적지도 찍히지 않은 기차표를 들고 멍하니 있곤 하는 치매든 전순례 할머니, 어린 시절 일을 떨치지 못한 별어곡역 주변 제과점 여자. 작가는 별어곡을 배경으로 흔적 없이 스러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성과 배경 묘사는 그의 초기작인 단편 '사평역'(1983)과 흡사하다.

"사평역은 단편인데다 초기 작품이고 시간이 상당히 지났죠. 근래에 절실히 느끼는 건 '우리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데 과연 그러한가'란 거예요. 같은 공간과 시간에 살고 있겠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변하고 없어지죠. 이번 소설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우리가 간이역처럼 홀로 흔적 없이 스러져 가는 것들을 애정을 갖고 바라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어두운 현실 빛나는 서정

가을(별어곡의 시인- 정동수), 여름(이별의 골짜기- 신태묵), 겨울(귀로-가방 할머니), 봄(손가락- 제과점 여인) 등 소설은 사계절을 테마로 묶였다. 이 소설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 겨울, 가방 할머니 순례 이야기다. 50대 초반의 여자와 함께 마을에 온 70대 중반의 노파는 늘 커다란 가방을 끌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열여섯 나이에 방직공장에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노파는 해방 후 남북분단으로 가족마저 잃고 조카의 수발을 받으며 살고 있다. 생생하게 묘사된 노파의 삶은 우리 현대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5‧18을 비롯해 한국전쟁 등을 그린 작가에게 정신대 문제 역시 그 연장선으로 읽힌다고 말했다.

"의도적으로 문제를 부각 했다기보다는, 그 대상을 통해 사람을 그리고자 하는 거죠. 격동의 역사를 겪고 나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훼손시키고 지배하게 되는 거죠. 이번에도 그런 (상처받은) 인물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작품에서는 또 다른 상처의 근원을 이야기하려 한 거죠."

이 치매든 할머니는 그의 초기작 '사평역'에서 역사를 떠돌다 끝내 기차를 타지 않는 미친 여자와 비슷하다. '사평역'의 그녀는 그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삶의 덧없음을 표상하는 중요한 이미지로 부각된다. 이렇듯 간이역을 배경으로 두 작품이 겹쳐 읽히는 것은 당연하다. 작품의 근원 정서는 여전히 '어둡고 무섭고 가능하면 빨리 거기서 나오고 싶은 세계'(김현, 같은 글)이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체념에서 벗어나 삶에 대한 희망으로 한걸음 나아간다. 가령 사평역에 아름답지만, 덧없는 눈이 내린다면, 별어곡에는 희망의 나비가 날아드는 것처럼.

'먹빛 어둠은 화폭으로 드리워지고 네모진 창틀 너머의 순백의 눈송이들이 화폭 위에 무수히 흩날리고 있다. 거기에 톱밥 난로의 불꽃이 선연한 주황색으로 투영되어지자 한순간 그 모든 것들은 기막힌 아름다움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아아, 저건 꿈일 것이다. 아름답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름다운 것' (단편 '사평역' 중에서)

'저게 뭘까. 청년은 눈을 크게 뜬다. 하얀 나비다. 작고 여린 나비 한 마리가 야광처럼 희붐한 빛을 내뿜으며 바로 눈앞, 바깥 유리면에 가만히 붙어 있다. (…) 창밖 어둠을 반딧불처럼 환하게 밝히며 흰나비 수십 마리가 허공에서 고요히 맴돌고 있다.' (장편 <이별하는 골짜기>, 가을 중에서)

"별어곡의 상황이 어둡고 절망적인데, 개인의 살아나올 수 있는 힘이랄까, 그건 결국 어떤 꿈 같은 겁니다. 빛 같은 것. 그걸 나비로 상징화시킨 거죠."

작가는 이 아픈 사연들을 통해 '삶은 아름다움만도 슬픔만도 아닌 것, 두렵고 끔찍해도 맞서야 할 현실'임을 일깨운다. 이별하는 골짜기, 퍽 애잔한 이름을 지닌 산골역을 작가가 기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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