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출간, 글쓰기 통한 소통이야기… 자전소설로 오해하지 마세요

소설가 강영숙이 장편 <라이팅 클럽>을 냈다. 2006년 낸 <리나>에 이은 두 번째 장편이자 5번째 소설책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여성 성장사' 3부의 두 번째 작품이다.

너의 라이프스토리를 말해줄래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작가가 발표한 시와 소설에는 치밀하게 밀어붙이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이것이 누구에게는 민족이고, 누구에게는 계급이고, 누구에게는 미학일 수도 있을 터, 작가 강영숙에게 그것은 여성과 가족 같은 젠더의 문제로 보인다. 역시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녀의 소설에는 유독 엄마와 딸이 단 둘이 살아가거나,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유사가족의 형태가 많다. 남성은 대개 조연 정도로 그려진다. 주인공은 거의 모두 여성인데 사실 몸만 여성일 뿐, 행동이나 말, 생각하는 것은 중성에 가깝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전통적 여성주의와도 선을 긋고 있는 셈이다. "제가 원래 가족주의를 싫어하잖아요." 작가가 말했다.

"소설로 모계사회를 그린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쓰다 보면 남자를 부차적인 인물로 그리거나 아예 고려 안 하게 된 거죠."

이 '베이스' 위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장편 <리나>에서 그것이 국경을 넘는 소녀로 그려졌다면, 신작에서는 글쓰기 이야기로 점철된다.

<리나>에서 주인공 리나가 17살 소녀에서 국경을 넘으며 성인이 되고, <라이팅 클럽>의 주인공 영인 역시 17살에 이야기를 읽고 쓰기 시작해 '라이팅 클럽'을 결성하며 성인이 된다. 두 편의 장편을 두고 '여성 성장사'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라이팅 클럽>은 그 제목처럼 '글쓰기'(라이팅)를 통한 '소통'(클럽, 모임)의 이야기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소설가가 글을 소재로 소설을 쓴 것이다. 그러니 얼핏 자전소설로 비춰지기도 한다. "여러 매체에서 자전소설, 자전적 성장소설로 소개됐다"고 말하자, 작가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소설의 얼개가 작가와 관계 있지만, 자전소설은 아니에요. 제가 싱글맘도 아니고, 저희 엄마가 작가도 아니고요. 소설가가 이 작품의 핵심도 아니고요. 책을 통해 자기를 비춰가는 일종의 성장사죠."

모성애가 없는 엄마와 엄마를 '김 작가'라고 부르는 딸이 있다. 말하자면 '내 인생은 내 인생, 네 인생은 네 인생'을 사는 쿨한 모녀인 셈이다. 이력이라곤 이름 모를 문예지에 에세이 한두 편을 발표한 게 전부인 엄마는 서울 계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벌고자 '글쓰기 모임'을 만든다.

그런데 이 모임은 그 취지에 걸맞게 글쓰기를 한다거나 모녀의 생활기반을 닦는 데 전혀 쓸모가 없다. 글을 핑계로 술 마시고 수다나 떠는 엄마와 회원들을 딸은 당연히도 한심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말한다.

"세상에, 이런 쓰레기들을 보았나!"(184페이지)

생활력과 모성애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김 작가'를 모시고 사는 딸 영인은 이야기를 읽으며 이 현실을 '견뎌낸다'. 시몬느 베이유의 <노동일기>,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읽을 때면 내 삶도 이들처럼 숭고한 것만 같다. 글 읽기 욕망은 글쓰기 욕망으로 이어진다.

소설책을 덮고, 작가와 마주 앉았다.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글 쓰는' 이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으면 좋겠어요. 주인공은 글을 쓰면서 현실의 비루함을 견디잖아요. 사람들은 대가 없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현실의 비루함을 견디는데, 그때 글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는 개별적인 행위고,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행위니까요."

현실과 환상

그런데 막상 소설에서는 딸 영인이 무슨 소설을 쓰는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프로 작가 J가 영인의 글을 보고 이런 저런 조언을 하는 장면이 슬쩍 비춰질 뿐이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실 내용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작가는 영인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영인이 매달리는 것은 글쓰기 자체, 글을 매개로 한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엄마의 '계동 글쓰기모임'을 욕하던 딸은 미국으로 건너가 '라이팅 클럽'을 결성한다. 영인의 라이팅 클럽에서도 중요한 건 글쓰기가 아니라 글을 매개로 한 소통하기다.

흔히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현실성이 없다'라고 평하면 부정적 뉘앙스로 비춰진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말의 다른 어법으로 풀이된다. 가령 별 볼일 없는 노처녀가 재벌 2세 만나 팔자 고치는 이야기는 모두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전형이다. 이유는 지극히 희박한 가능성, 그러니까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객관적으로 비현실성은 대중이 재미를 느끼는 가장 강력한 요소들이다. 절대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는 대중이 잠시나마 팍팍한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소설 속 영인의 도피처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영인은 짬 나는 시간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만 죽어라 읽어댄다. 주인공 돈키호테가 허세를 부리는 장면과 글을 읽고 쓰는 영인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니 황폐한 현실에도 영인은 우울하지 않다.

"제가 다른 사람의 글을 볼 때 세계관보다 어떤 톤이랄까, 에너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그 작가만의 기가 느껴질 때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담고 싶었어요. 에너지 있게 툭툭 던지는 식으로."

이런 저런 책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영인을 볼 때, 독자는 이 소설을 펼쳐든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게 된다. <돈키호테>를 읽는 영인, 영인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 소설은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현하고, 대결하는 것임을 강영숙의 소설은 보여준다.

'쿨하고 무덤덤한 외양을 하고 있는 소설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체념적 비관과 환멸이 깊이 숨어있다. 세상의 우울을 함께 견디며 어쩌면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숨어 꿈꾸는 우울증적 유머의 세계, 그것이 강영숙 소설의 세계다.'

세 번째 작품집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에 실린 평론가 김영찬의 해설은 이 장편에도 유효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