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머리 소년과 맑은 얼굴의 소녀로 20년간 자신만의 '신선도' 그려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 머리카락 한 올까지 가지런한 소녀의 눈망울이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그만 내면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소녀 옆의 나비와 꽃만이 바람에 흔들린다.

명상화가로 불리는 박항률 작가(60)는 지난 20여 년간 까까머리 소년과 맑은 얼굴의 소녀로 자신만의 '신선도'를 그려오고 있다. 소년과 소녀는 견자(見者)와 정면으로 마주 보기보다 한쪽 뺨만을 드러낸 옆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문일까. 그림 속 아이들은 지상에 없는 평화와 고요를 호흡하는 듯하다.

그들을 통해 찾아가고자 하는 것은 인물의 '원형'. 박 화백은 어느 순간 화폭의 인물을 익명화시킨다고 했다. 모델 없는 그림, 그러나 어디엔가 있을 법한 얼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내 딸 닮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은 화가와 가장 많이 닮았다. 꾸밈없이 맑은 표정을 한 그는 예순의 소년이다. 1992년 그리기 시작한 까까머리 소년은 자화상과도 같다. 캔버스에 소녀가 들어온 건 98년쯤.

91년 첫 시집을 펴내면서부터 화풍이 크게 바뀌었다. 이전까지 그는 설치작가였고, 앵포르멜 작가였다. "시집을 쓰면서 생각했죠. '지금 내가 그리는 것이, 내가 꼭 그리고 싶었던 것인가.' 막연하게 신선도 같은 걸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2~3년쯤 지나서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 살펴보니 '명상성'이더군요. 시간을 되돌려보면 지금 같은 그림을 고등학생 때 그린 적이 있어요. 어찌 보면 한 바퀴 돌아온 셈이죠."

추상화를 그리면서 쓰던 기법을 고스란히 지금도 이용한다. 커다란 책상, 화판 위에 놓인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찍어내고, 붓으로 그린다. 가끔 스텐실 기법도 사용한다. 10개가 채 안 되는 원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낸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가져온 습관이다.

뿌리고, 찍어내는 과정은 곧 색을 겹쳐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크릴 물감으로 얇게 칠한 캔버스에서 조각 같은 마티에르가 느껴지고 은은한 빛이 나는 건 이 때문이다. 손이 여러 번 가다 보니, 작품을 완성하는 시간은 소품만도 열흘 정도 걸린다.

작업실의 25년 된 화판과 물감을 닦아내는 키친타올과 캔버스를 찍어내는 한지에도 '박항률 표' 색감이 입혀진다. 어떤 이는 화판을 가지고 싶다 하고 어떤 이들은 물감으로 얼룩진 키친타올을 일일이 펴서 가져가기도 한다. 그 자체가 훌륭한 추상화다.

"전 색이 '기(氣)'라고 생각해요. 젊고 건강할 때는 힘이 느껴질 정도로 건강하고 좋은 색이 나오지만 나이가 들거나 몸이 안 좋거나 하면 색은 바뀝니다. 분석해보니 많은 화가들이 같은 과정을 겪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좋은 색을 만들기 위해 예전보다 더 노력합니다. 요즘 제 작품은 색에서 힘이 좀 빠진 대신 전체적인 형태와 색감은 부드러워졌지요."

색감도 중요하지만 그가 작업 중 가장 공들이는 부분은 인물의 표정이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다 보니 같은 얼굴이 많이 그려져요. 그때마다 그림이 요구하는 표정들이 있지요. 그림에 빠져 있다 보면 '이놈 잘 빠졌네, 아이고 예쁘다!'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허허"

시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백은 직접 시를 쓴다. 지난해 네 번째 시집 <그림의 그림자>를 펴냈다. 수필이 섞여 있지만 그마저도 시적이다.

"그림쟁이가 펴내는 책이니 옛날에 써놓은 글을 싣기도 하고 그래요. 제겐 시라기보다 그림을 그리려는 방편인 것 같아요. 다른 분들이 제 시는 그림과 똑같다고 하더군요. 젊을 때 쓴 글이 많은데, 정호승 시인이 몇 편 읽어보더니 왜 이리 어렵게 쓰냐더군요. 요즘도 가끔 쓰는데, 요즘 글은 좀 쉬워요. (웃음)"

박항률 화백에겐 소중한 인연이 몇 있다. 동갑내기 정호승 시인과는 시집을 통해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9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을 보고 정호승 시인이 그를 찾아왔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는 박 화백의 펜화가 담겨 있었는데,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정호승 시인은 "산문집을 내려고 하는데, 펜화 좀 그려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정호승 시인에게 그림을 그려주거나 이미지를 빌려준 책이 10권에 가깝다. 요즘도 정 시인은 박 화백의 새로운 작품이 궁금할 때마다 화가의 작업실을 찾곤 한다.

박 화백의 그림을 유독 아낀 이들 중엔 고 법정 스님도 있다. 2000년 이후 박 화백의 개인전을 한 번도 빠짐없이 찾으며, 박 화백에게 '진공(眞空)'이라는 법명도 지어주었다. 고마운 마음에 스님께 까까머리 소년을 그려 드리니, 스님의 반응이 의외였다. "또 까까머리야? 우리가 만날 머리 깎고 다니는데. 난 소녀가 더 좋아." 그렇게 선물한 소녀 그림엔 '봉순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법정 스님 오두막에 걸렸다.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에도 등장하는 '봉순이'는 스님과 종종 대화를 나누기도 했단다. 봉순이가 법정 스님의 여동생을 닮아 살뜰히 아꼈다는 일화는 잘 알려졌다.

최근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 행적을 엮고 있다. 봉순이의 사진이 필요한데 구할 길이 없자, 박 화백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슬라이드로 찍어놓지 못한 박 화백은 봉순이와 거의 같은 콘셉트로 그린 그림의 슬라이드를 대신 건넸다. "나이가 15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녀인데, '봉순이가 조금 더 컸으면 이럴 거라'고 하면서 이미지를 전했죠."

11월 28일까지 가나아트 부산에서 개인전을 여는 박항률 화백.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가나아트센터에 있는 작업실로 출근한다. 3년 전, 대형 작품을 위해 옮겨온 이곳엔 인터뷰 하루 전에 완성된 작품도 벽에 걸려 있었다. 주홍빛으로 영근 단감나무 가지 아래 신비한 소녀가 앉은 그림이다. 화사한 빛에 눈이 부시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