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앙팡테리블] (89) 작가 서상익두번째 개인전 , 일상과 상상 사이 다양한 이야기

언뜻 보면 한가롭다. 플랫폼에서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기다림의 시간이란 저렇듯, 유예되어 있고 모호하다. 저마다 다른 방향을 향한 채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

첫눈에는 평온함에 반한다. 하지만 그림 앞에 머물러 보면, 심상치 않은 낌새가 속속 감지되기 시작한다. 후줄근한 옷차림의 사내 손에는 총이 들려 있다. 평범해 보였던 할머니의 배부른 가방에서 빠끔 고개를 내민 것은 고액 지폐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은 소녀는 편지를 읽고 있다. 그녀가 길을 떠난 것도 그 편지 때문일까? 소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스위스 기차역 플랫폼의 풍경은 유난히 여유롭더군요. 그런데 문득 저 사람들의 삶도 각자 드라마틱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하나씩 단서를 쥐여주기로 했죠."

'사연 많은 도시'처럼 서상익 작가의 그림에는 읽는 즐거움이 있다. 무대가 있고 캐릭터가 있으며 드라마가 있다. 이야기는 일상과 상상 사이에서 솟아난다.

2008년에 연 첫 개인전 <녹아내리는 오후>에서는 작가 자신의 자취방이 환상의 무대였다. 침대에 숫사자가 누워 있는가 하면, 록그룹 건즈앤로지스의 기타리스트가 연주를 하기도 했다. 벽에 걸린 그림 속 남자가 작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기도 했다. 작가는 그런 혼재된 상태야말로 삶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일상이 반복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오늘은 각각 다르죠. 공간이 같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도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상상과 섞여 달라지니까요."

지난 12월 10일까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 <서커스Circus>에서 서상익 작가는 더 다양한 공간과 상상, 더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그림 속 미술관과 재개발 아파트, 고향집 등이 각자 자신의 사연으로 왁자지껄했다.

'Paint it Black'은 미술관에서 일어난 일이다. 원숭이 한 마리가 그림 하나를 까맣게 칠해 놓곤 좋아한다. 관객들이 앞다투어 사진을 찍는 동안 바닥에는 커트 코베인이 절망한 자세로 쓰러져 있다. 이는 첫 개인전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발을 들여 놓은 작가의 심정이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가 되는 것은 '쇼 비즈니스'의 일원이 되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다. <서커스>라는 전시 제목도 그로부터 왔다.

전시장 한 켠에는 재개발 아파트가 서 있다. 주변은 황량한데 아파트 앞에 탁구대 하나가 떡하니 놓여 있다. 아파트 내부에서는 음모와 암투, 록밴드 공연이 시치미 뚝 떼고 벌어지는 중이다.

'핑퐁X끝없는 랠리'는 세계가 '깜빡한' 사람들끼리 탁구 치는 이야기인 박민규 작가의 소설 <핑퐁>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그러고 보면 서상익 작가의 시선에는 어떤 범상한 삶에서도 특별함을 발견해내는 진중함과 온기가 있다.

소파에 앉은 중년 여성을 그린 '엄마의 정원'의 모델은 작가 자신의 어머니다. 작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거동이 불편했던 어머니를 보는 마음이 녹아 있다.

"꽃을 좋아하셔서 벽지도 꽃무늬로 고르셨는데 몸이 편찮으시니 식물을 기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림 속 엄마가 앉은 쇼파 뒤의 꽃무늬 벽지를 최대한 넓게 그려 드렸어요."

자취방을 뛰쳐 나온 서상익 작가의 이야기는 앞으로 얼마나 넓고 깊어질까. 두고두고 지켜 볼, 아니 지켜 읽을 그림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