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현 감독성격ㆍ나이ㆍ문화적 차이 넘은 자신의 연애 스토리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아

세상에 어느 연애가 삶을 뒤흔드는 일이 아니겠냐마는, 이들의 연애는 정말 특별하다. 대략의 과정만 따라가 볼래도 숨이 찬다.

인연이 시작된 것은 2005년 가을. 쿠바로 여행을 떠난 다큐멘터리 감독 정호현은 멋진 눈빛과 미소를 지닌 10살 연하 쿠바 청년 오리엘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불꽃 같은 연애도 잠시, 예정됐던 4개월이 지나고 감독은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 이후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그들은 겨우 일주일에 한 번의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그리움만큼이나 단풍이 붉었을 2006년 가을 감독은 결국 다시 쿠바로 떠난다. 그렇게 사랑은 무르익어 간다. 2007년 봄 오리엘비스는 감독을 따라 한국으로 온다.

처음 타는 지하철에 어리둥절해 하고, 급박한 속도감에 치이고, 끝없는 소비에 놀라고, 불편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이 순정한 청년은 "이래도 한국에서 살 수 있겠냐"는 감독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너만 있다면."

세상의 어떤 연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만 있다면'으로 해피 엔딩을 맞지만, 이들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는 정말 사연이 많다. 성격 차이, 나이 차이는 물론 문화적 차이, 국제관계까지 넘어서야 했다.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감독이 오르엘비스를 가족에게 소개하던 날, 어머니는 아직 있지도 않은 손주의 운명에 대해 걱정했고 오빠와 새언니들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며 어린 조카들은 "신기롭다"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국과 쿠바 사이가 '이적 국가'인 탓에 결혼은 주일본 쿠바대사관과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을 거쳐서야 성립됐다.

"끊임없는 도전이었죠.(웃음)" 정호현 감독은 이 '글로벌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 영화 <쿠바의 연인>에 담아냈다. 낯선 문화를 이해하고 국가 경계를 넘으며 세상의 편견을 온 마음으로 통과한 과정이다. 여기에 쿠바의 정치적 상황,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불려 들어와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곧 두 세계의 만남이다.

각자가 물려 받고 대항해 온 삶의 터전의 문제가 함께 제기된다. 만남이 열정적일수록 차이와 한계도 맹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점점 더 의지적 결단이 된다. 연애가 혁명인 것, 사랑이 정치이고 철학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마주 웃기 전까지 세상이 있는지도 모르며, 마음을 다해 부대끼고 건너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세상을 알지 못한다.

<쿠바의 연인>은 그 점을 가르쳐 준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또 하나의 세계가 태어난다. 바로 아들 파드론 정 이안이다. 연인은 가족을 꾸렸고, 아이는 한국과 쿠바를 넘나드는 열정적인 운명을 타고 났다. 지금은 1년 넘게 한국에서 살고 있다. 이만하면 제대로, 연애 이야기다.

지난 6일 정호현 감독을 만났다. 첫 마디는 역시나 "연애하세요." 세상의 모든 메마른 가슴에 용감한 연애를 권하는 이 영화는 13일에 개봉한다.

영화를 보며 한국에는 왜 오르엘비스 같은 남자들이 사라졌을까, 생각했다. 기쁘고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한국의 '초식남'들과 정반대다.

"쿠바 남자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어서인지 한국 사람들보다 계산적인 면이 없다. 착하고 다정한 남자들이 많기로 소문 났다. 국제 결혼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쿠바 남자와 한국 여자 커플은 흔치 않을 텐데. 한국에서 사는 게 어렵지 않나.

"아무래도 편견에 종종 부딪힌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이차가 10살 난다고 결혼 의도를 의심하더라. 하지만 나이가 문제 되는 건 한국에서뿐이다. 쿠바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쿠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을 만나면 속상하다."

남편이 한국 문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뭔가.

"지금 한 외국어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공부만 해야 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느끼는 것 같다. 학생들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분이라고 하더라."

영화 속에서는 한국의 소비 문화에 대해 이상하다고 말했다. 자신은 소비와 상관 없이 자라 어디까지 소비해야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고 말이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다. 3년 정도 지나면서 많이 적응한 것 같다. 요즘은 아이폰4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웃음) 처음 접해본 소비 문화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매혹되기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내가 쿠바에 처음 갔을 때 춤추는 광경만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거리 두기가 되지 않을까. 그도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버는 만큼 써야 해서 생활은 쪼들린다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 같다."

감독 자신도 느끼는 바가 많을 것 같다.

"쿠바는 경제적으로는 열악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우리보다 더 여유롭다. 사람들이 더 많이 웃고 춤춘다. 일상 속 언어에 해학과 리듬이 있다. 그걸 보면 개발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개발하면 인공적인 것들이 많아질 것이다. 관계도 인공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개발이 불필요하다고 하기에는 쿠바의 사정이 너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도 그런 고민이 잘 드러난다. 현지인 인터뷰를 통해 쿠바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드러내서 쿠바를 낭만적으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쿠바를 여러 번 찾아가고, 오랜 기간 머물게 되면서 그곳을 찍는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분명히 모순과 문제가 있는 사회를 낭만적으로만 그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양면을 균형 있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영화 속에서 쿠바 사회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말해준 등장인물 인터뷰가 중간에 중단됐다. 왜 그런 건가.

"쿠바에서는 공식 허가 없이 촬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관광객들까지 일일이 단속하지는 않지만, 문제가 될 수 있다. 내가 정치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본 한 이웃이 문제를 삼았다. 그 인터뷰이의 아버지가 친정부적인 분이라,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계속 한국에서 살 예정인가.

"오르엘비스는 한국에서 몇 년 더 머물며 디자인과 음악 등의 일을 할 예정이다. 나와 아들 이안은 내년 봄 쿠바에 갈 계획이다. 쿠바의 무상 의료에 관심을 갖고 쿠바 의료계와 꾸준히 접촉해 온 한 의사가 한국과 쿠바 간 교류문화재단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쪽 일을 돕기로 했다. 그리고 차기 작업도 할 생각이다."

어떤 내용인가.

"쿠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을까 한다. 그들은 13살부터 연애를 하고, 가족들도 그 관계를 지지해준다. 어려서부터 관계 맺는 훈련을 하는 거다. 삶 속에 사랑이라는 개념이 깊숙이 넓게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이 작업을 하는 게 앞으로 아들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금 세 살이니까 10년만 지나면 여자친구를 데려올 거다.(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