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간… 10년 만에 귀국 선물

시인 허수경 씨가 한국을 찾았다. 두 권의 시집을 내고 독일로 떠난 그녀는, 그곳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며 시를 써 왔다.

마지막으로 한국을 찾은 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던 2001년이었으니, 햇수로 10년 만의 고국 방문이다. 다섯 번째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장편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도 때 맞춰 발간됐다.

찐빵으로 허기 달래던 아이

허수경 시인과의 인터뷰 자리에는 여러 문인들이 있었다. 인터뷰 후에 있을 낭송회 때문이었다. 낭송회는 문학계 선후배들이 시인의 신작 시집에서 작품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독자들은 20대 연인부터 50대 아줌마 부대까지 다양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후배 시인 김이듬의 말처럼 허수경은 이미 시단에서 "레전드"로 통하지만, 그녀를 책으로써만 만난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자는 인터뷰에서 소설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신작 <아틀란티스야, 잘 가>는 작가의 자전소설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뚱뚱하고 외로운 한 소녀의 참담한 실패담"이다. 주인공 경실은 전교에서 가장 뚱뚱한 중학생 소녀다. 뚱뚱해질까봐 겁이 나는데도 단팥이 소로 든 찐빵을 좋아한다.

그 달콤한 맛이 외로움을 달래주었기 때문에. 부패 공무원인 아버지와 계모임으로 바쁜 어머니 사이에서 경실은 찐빵 먹기와 일기 쓰기로 허기를 달랜다. 토요일 오후의 독서클럽 활동은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다.

어느 날 이복언니 정우가 나타나고 경실에게 사라진 대륙 아틀란티스에 대해 들려준다. 둘은 매일 밤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나누며 꿈을 꾼다.

자전소설도 소설이다. 작가의 경험과 그럴듯한 허구가 맞물려 펼쳐지는 이야기가 자전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의 경험은 얼마나 녹아 있을까? "이 아이의 외로움은 자전에 가까운데, 사건은 모두 지어낸 이야기"란 대답이 돌아온다.

"어떻게 보면 '자전'이라는 것도 시간에 의해서 변형되거든요. 어제 쓴 일기도 100% 사실은 아니라는 말이죠. 왜냐면 기억이 시간에 의해서 변형되고 소멸되고 탄생하니까요."

경실의 일기에도 이런 허구가 담겨 있다. 경실은 일기를 쓸 때 스스로를 '미미'라 부르며 또 다른 자신을 상상한다. 경실은 독서클럽 친구들에게 각자 자신이 꿈꾸는 아틀란티스에 대해 써보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클럽의 멤버 용식이가 쓴 '독재자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는 글로 경실은 경찰서에 불려간다.

취조 과정에서 경실의 아틀란티스 역시 반체제로 오해받는다. 아이들이 꿈꿀 권리를 잃어버린 채 울고 있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작가의 유년 시절, 서슬 퍼런 70년대가 그려진다.

"제가 이제 40대 중반이거든요. 기성세대잖아요. 어떤 의미에선 기성세대의 허위, 기만을 어린 시절부터 길러왔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이걸 쓰면서."

빌어먹을, 구슬픈 가락

장편소설이 '작가 허수경'을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면, 신작 시집은 독자들의 기대에 값하는 절창이 가득한 책이다.

그녀가 처음 문단에 나왔을 때, 그 충격은 지금의 어느 스타 못지않았다.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등을 통해 시인은 우리말의 가락을 살린 독특한 어법으로 새로운 관능의 세계를 선보였는데, 혹자는 이를 '울렁거림'(문학평론가 서영채)이라고 했고, 혹자는 '뽕끼'(시인 함성호)라고 했다.

그녀의 시는 역사의 폐허와 인간의 외로움을 여성의 구슬픈 곡조와 결합시킨다. 취기 가득한 유랑가수의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 이것이 허수경의 시였다.

이후 발표한 두 권의 시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앞에 붙은 수식어는 '독일'이다. 허수경 시인은 1992년 독일로 건너가 2006년 고대근동고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독일인 교수와 결혼해 그곳에서 살고 있다.

동어반복을 통해 깊어진 작품세계를 펼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매번 다른 감각과 어휘를 보여주는 작가가 있는데, 허수경은 단연 후자 쪽이다. 시집을 낼 때마다 그 노래가락이 새롭게 읽히는 이유는 그녀의 몸이 진주에서 서울로, 다시 독일로 옮겨간 까닭일 게다.

신작 시집의 제목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다.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위하여 아주 오래된 노래를 불러주고 싶었다.'

시집은 고고학적 사유를 담아 자연과 문명을 통찰한 시 54편이 담겨 있다. 표제작 '차가운 심장'은 연민을 잃어버린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상징이다. 독자 앞에서 그녀가 자주 낭송하는 시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에는 문명의 끄트머리에 선 자의 쓸쓸함이 묻어있다. 이 시집에서 가장 긴 시 '카라쿨양의 에세이'는 양의 시선으로 존재의 비극성을 노래한 시다.

"이번 시집은 꽤나 말이 많아졌어요. 우리말 쓸 일이 거의 없어서 시에 쏟아내다 보니 이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웃음)

작품의 길이만이 아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형식을 차용한 작품도 선보인다. 그녀는 "이번 시집이 어떤 의미에서는 첫 시집이다"고 말했다. 이전 4권의 시집이 선배 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아 쓴 시라면, 이번 시집은 후배들의 시에서 영향을 받아 쓴 첫 번째 시집이라는 뜻이다. 신작은 시인의 옛 관성에서 탈출하면서, 동시에 자기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

"나이 어린 시인들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배가 후배에게 영향 받는 게 웃기는 일이 아니거든요. 전통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교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할 것 없이 후배들 시가 그렇게 좋았어요. 저는."

A4사이즈, 가로로 눕혀 인쇄한 특별판과 일반판 두 가지 버전으로 출간한 시집의 반응은 고무적이다. 발간 일주일 만에 특별판은 2쇄에 들어갔다.

그 시집에서 그녀는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고 썼다. 이런 순정한 마음이 그녀를 다시 전업 작가로 살게 했을 것이다. 그 소망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현재 사회는 젊은층이 점점 비정규직화 돼가는 시대"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말은 시인도 노점상과 노동자처럼 몸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흔히 평단에서 허수경의 곡조를 들어 '몸을 통과해 빚어낸 언어'라고 했다. 이는 빈 말이 아닌 듯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