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5주년 음반 내고, 전국 순회투어 출발

눈물이 글썽이는 이유는 세월의 무상함보다 새로운 감회에 젖어들었기 때문이다.

1965년 스무 살의 나이에 1집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매했던 청년은 첫 무대를 서울시민회관(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갖는다.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해병대에 자원해 군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월남전에 파견된다.

그로부터 3년 후 군 제대후 첫 복귀 무대를 역시 서울시민회관에서 갖는다. 이후 가수로서 처음으로 '가수왕' 트로피를 거머쥔 곳도 서울시민회관이다.

가수 남진은 이렇듯 과거 서울시민회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인연의 연결고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남진은 3월 5일 데뷔 45주년 기념 '님과 함께 45주년' 콘서트도 이곳에서 갖는다. 아련한 추억을 새록새록 꺼내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군 제대 후 첫 복귀무대에서 '오빠!'라는 환호성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당시 팬들의 열렬한 환호와 박수는 군 입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순간이었죠. 3년 사이에 팬들은 더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있었어요. 그 출발점이 서울시민회관이 아니었나 싶네요."

남진은 당시 무대에라도 서있는 듯한 기분으로 팬들의 환호성을 설명하며 그때의 추억들이 벅찼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남진은 우리 가요사의 1960~70년대를 책임진 대표적 대중가수다. 라이벌 가수인 나훈아와 함께 대중가요의 전성기를 풍미했던 사람이다. <님과 함께>, <둥지>, <우수>, <그대여 변치 마오>, <울려고 내가 왔나>, <빈잔>,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45년 동안 1000여 곡을 발표하며 대중을 웃고 울렸다.

45년 가수 생활의 원동력은 "팬"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기획해 팬들과의 만남을 자청했다. 올해는 서울을 시작으로 일산, 대전, 수원, 인천, 부산, 대구, 광주, 목표, 제주 등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팬들에게 봉사할 예정이다. 45주년 기념 음반도 발표했다.

"팬들도 예전 학창시절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겠지만, 저 또한 그때를 생각하며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어요. 군 제대 후 첫 리사이틀을 열고 준비하던 과정이 아직도 생생해요. 표를 사기 위해 까맣게 줄을 선 팬들을 보며 긴장감을 날려버렸던 그 당시가 떠오르네요."

45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계획한 이유가 있는가?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사는 것 같다. 오랜 세월 팬들이 준 사랑을 기억해내고 싶고, 그들에게도 나에 대한 추억을 돌려주고 싶었다. 체력적으로 달리지 않기 위해 꾸준히 운동하며 10kg도 감량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올 1년 동안은 전국을 돌아다닐 것 같다.

기념앨범에는 어떤 곡이 있나

<둥지>와 <저리가> 등을 작곡한 차태일씨가 작곡하고, 양인자씨가 가사를 쓴 <너 말이야>라는 곡이다. 5년 전부터 준비했던 곡인데 양인자씨가 가슴에 와 닿는 가사를 써주어 멋진 곡으로 탈바꿈했다. 이번 공연에서 처음 선보일 곡이다. 이번 무대에선 30여 곡을 부르기 위해 18인조 밴드, 50여 명의 합창단 등이 함께 오른다. 2시간의 공연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무대를 고집하는 이유는?

나의 팬들은 50~60대가 많은데 공연을 할 때 그분들은 '오빠'라며 소리쳐 주신다. 그러면 객석에 있는 아주머니들이 순간 소녀로 보인다.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맺히며) 나를 보면서 현재를 잊어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다. 정말로 그분들은 20대 표정이 나온다. 그 순간 나도 힘이 난다. 60이 넘은 나이지만 춤도 추며 열정적으로 변한다. 극장에서 공연하던 세대로서 관객과의 교류가 여전히 좋다.

가수 생활 동안 고비도 있었을 텐데

세 번의 고비를 넘겼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군대 생활로 인해 3년 동안 가수활동을 할 수 없었을 때다. 제대해서도 무대에 복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두 번째는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지냈던 3년간의 공백기다. <빈잔>이라는 곡으로 재기할 수 있었는데 너무나 기뻤던 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적 외압에 의해 노래를 할 수 없었을 때다.

(5공 시절에) 고향인 목포로 내려가 몇 년을 쉬면서 가수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잘 극복했던 것 같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런 별칭은 내게 너무나 영광이었다. 가수가 되기 전인 대학시절(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친구들과 함께 당시 대학가에 많았던 음악감상실을 주로 다녔다. 그 곳에서 팝을 접하며 거의 매일 LP판을 틀어놓고 음악을 들었다. 그 때 엘비스 프레슬리와 톰 존스 등의 음악을 자주 들었다.

가수가 된 이후에는 이런 것들이 자산이 됐다. 또 1973년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쇼를 보고 감격했다. 팸플릿 하나 들고 그의 무대 의상을 사서 입고 공연하곤 했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칭호는 내게 너무 좋은 수식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트로트 가수'로 불린다

트로트는 음악적 장르 중 하나다. '쿵짝 쿵짝'라는 빠른 템포를 가리키는 게 트로트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고와야지>로 트위스트 풍을, <둥지>로 록앤롤을, <님과 함께>로 고고 스타일을 불렀다.

<그대여 변치 마오> 등은 리듬이 빠른 삼바나 라틴 스타일이었다. 단순히 '트로트 가수'라는 수식어는 잘못된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먼저 히트한 곡 <울려고 내가 왔나>나 <가슴 아프게> 등은 완전한 트로트 곡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깊은 감성을 토해내는 트로트 곡을 잘 부르고 싶다.

후배 가수들과의 작업도 눈에 띄는데

지난해 가수 장윤정과 듀엣곡 앨범을 출시한 적이 있다. 트로트계에선 듀엣 앨범을 잘 내지 않는데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운이 좋게도 너무 좋은 반응을 얻어서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난 연말 박현빈과의 듀엣 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그들만의 뚜렷한 개성과 내 음악적 스타일이 결합해 좋은 평가도 받았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꿈이 하나 있다. 내가 어릴 때는 영화가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매체였다. 그래서 배우가 되기 위해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고, 가수활동을 하면서도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지금도 연기를 하고 싶다. 내가 영화를 촬영했던 시절은 동시녹음도 안됐던 열악한 환경이었다.

지금은 TV를 통해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부럽다. 지금 연기를 하라면 시트콤에서 전라도 출신 형사반장 역할을 꽤 잘 할 것 같다(웃음). 코믹하면서도 재치 있는 연기를 해보고 싶다. 또한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 애쓰겠다. 그간에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하며 자신감이 없었지만 더 늦기 전에 눈 여겨봐 둔 후배가수를 양성하고 싶다.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