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김경신 공예가ㆍ경신공방 대표한지귀금속으로 세계적 인정… 옻 활용한 생활용품 창작에 전력

한국 공예에는 딜레마가 있다. 전통공예는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 또는 보호막에 기대 안주하거나 변신에 굼뜨고, 현대공예는 창조적 아이덴티티가 미흡한 가운데 조급하게 물신과 트랜드를 좇는 경향을 보여 공예 본연의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예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잉태되고, 인간의 생활과 함께 해왔기에 이 터전을 떠나는 순간 힘을 잃는다. 공예가 문화적 생태계, 삶의 조건들과 어우러져야 생명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오늘날 한국 공예는 전통의 현대화, 세계화를 지향하며 나름의 성과를 거뒀지만 당당하게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성'을 확보한 예는 드물다. 이는 전통공예, 현대공예 양쪽에 해당되는데 인류 보편의 미적 공감, 삶과의 친밀성 등에서 무언가 부족한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공예가 김경신씨의 삶과 작품 세계는 특출하다. 김씨는 국내보다 국제무대에서 먼저 그만의 독창적인 공예를 인정받았고, 이를 통해 한국 공예의 가능성과 비전을 보여주었다.

대학(서울산업대학 산업디자인과)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김씨는 1990년에 독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철학과 예술사를 전공한 후 포르츠하임 예술대에서 귀금속 공예 및 조각을 공부했고, 하이델베르크대학 예술사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한지조명등
이 기간 김씨는 94년 프랑스 파리가 주최하는 코미테콜베르 국제디자인 공모전에서 랑콤화장품 디자인 대상을 받으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고, 96년 대학 졸업 때는 신인상과 독일 공예공모전 장려상을, 98년에는 한지조형과 으로 독일 공예대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유럽 공예가들의 꿈이라는 미국 뉴욕, 시카고 국제공예미술박람회(SOFA)에 독일 대표작가 일원으로 참가해 미국 갤러리들과 컬렉터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목걸이, 귀걸이, 브로우치, 조명 등은 작품 당 600~700만 원, 1천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렸다.

김씨의 공예가 세계성을 인정받은 기반은 한지다. 그는 한지를 여러 겹 단단하게 붙인 뒤 파라핀으로 표면을 처리하고 금과 은을 전기분해 기법으로 결합시키는 특수한 기술을 활용했다. 이렇게 태어난 은 매우 가볍고, 물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수성과 내구성뿐만 아니라 빛의 투과성이 뛰어나다.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귀금속 공예와는 궤를 달리하는 은 유럽에서 정평이 났고, 98년 공예대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한지를 쓰는 프라우 김'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씨는 요즘 옻(漆)을 활용한 공예와 생활용품 창작에 힘을 쏟고 있지만 한지는 여전히 그의 작품의 중추다.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경신공방'을 운영하는 김씨에게 서양을 매료시킨 한지의 힘은 무엇인지, 우선 흔한 한지를 소재로 택한 배경부터 물었다.

코미테콜베르 국제디자인 공모전 1등상 수상(1994년)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기 때문에 귀금속으로 잘 나갈 수 있었지만, 톱(top)으로 전업작가가 되려면 남이 안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우리 한지는 세계 최고로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인간에게 주는 영향도 크다고 봤어요."

예술이 인간을 향하고 소통의 매개라고 할 때 한지 고유의 특성은 그러한 예술 본연의 기능을 발현하는 데 최적의 소재라는 설명이다.

"한지는 계속 봐도 싫증이 나지 않고, 한지에 투사된 빛은 사람을 평화롭게 하는데 그것은 자연의 빛이 주는 힘으로, 한지 작업을 하면서 유럽에 보급하고 싶었어요."

김씨가 한지를 택한 데는 한옥이 즐비한 원소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성장기에 배태된 정서도 한몫했다.

"어려서 하루 중 가장 먼저, 그리고 늘 대하는 것이 창호지를 바른 창, 빛에 따라 굴절되는 창호지였어요. 지금도 그 창호지에 대한 기억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데 이 정서는 다른 사람에게도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독일 공예대상 수상(1998년)
김씨는 가장 한국적인 한지를 택했지만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 독일로 건너가 공예에 앞서 포르츠하임 예술대에서 롤프로흐 교수에게 회화와 판화를 배운 것은 한지에 현대성을 접목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김씨가 대학생이던 94년 코미테콜베르 국제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은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1인1품'을 하는 전업작가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회사를 위한 작품을 하기보다는 내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요. 코미테콜베르는 에르메스, 이브 생 로랑, 랑콤 등 세계 70여 개 명품업체들이 참여하는 국제대회로 대상 수상자는 취업하면 수석 디자이너가 보장돼 언제든 취직할 수 있기에 내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어요."

그후 김씨는 한지 조각과 한지 회화를 귀금속과 접목시켜 ''이라는 장르를 개척해 독일 공예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98년 독일 공예대상 수상시 심사위원들은 유리제품으로 짐작했다가 종이귀금속이라는 초유의 작품에 놀라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자연재료와 금속을 결합시키는 전해주조기법은 김씨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독일과 한국에서 특허를 받았다.

한지귀금속
김씨의 국제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유럽의 개인∙그룹 초대전이 매년 100회를 넘었다. 2000년대부터는 미국 SOFA에도 참가해 최고의 평가와 함께 마케팅에도 큰 실적을 냈다.

2007년 2월 베를린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위한 '오마주 아 앙겔라(Hommage a' Angela)' 장신구전에는 전 세계 디자이너 64명 중 동양인으론 유일하게 김씨가 초청받아 한지를 활용한 장신구로 호평을 받았다.

이렇게 국제무대에서 독창적인 공예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씨는 2009년 9월 귀국해 자신이 태어난 북촌에서 경신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외국에서 잘 나가던 그가 귀국한 배경이 굼금했다.

"일종의 사명감이라고 할까요. 한지를 통해 21세기 한국문화를 유럽에서 보급시켰는데, 모국에서 한국인에게, 외국인에게 한국문화를 알려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후학을 가르쳐 한국문화의 주역들을 양성하고 싶었어요. 이것은 한옥에서 자라고 한국문화를 체화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귀국 후 민화, 승무, 다도 등 한국 전통문화를 한지 장신구와 함께하는 행사를 분기별로, 또는 1년 마다 진행해왔다. 올 5월에는 한지와 함께하는 전통행사로 한복입기, 절하기, 다과 등과 더불어 한국문화를 영상으로 보여줄 예정이다.

채색옻을 입힌 막사발과 소반
김씨는 특히 아이들에게 한국문화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가 현대 한지공예를 하게 된 데는 어릴적 경험이 영향을 주었어요. 아이들이 한옥 체험을 하고, 자연의 한지를 뜨고 하면 이것이 심층의 무의식에 남아 어른이 돼서도 한번쯤 돌아보게 되죠."

김씨는 최근 한지와 함께 옻을 현대 공예에 접목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6년 전부터 관심을 가져 온 전통 칠기를 오늘에 되살리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2005년 청주공예비엔날레에 독일관 한국인 공예대표로 참가했다가 베트남 한국인 공예대표로 참가한 채색옻칠 전수자 민경환씨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민씨는 우리나라에서는 명맥이 거의 끊긴 채색옻을 우연히 베트남에서 만난 일본인 명인을 사부를 삼아 10년간 도제식 수업으로 기술을 전수받았다.

민씨의 채색옻이 김씨의 귀금속 공예기술, 디자인과 접목되면서 전혀 새로운 독창적인 공예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소반, 의자, 타일, 조명기구 등 모든 생활용품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특히 옻칠한 막사발은 다양한 색감으로 제작, 오묘한 색이 가슴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다가온다. 김씨는 지난해 5월 열린 '월드 IT쇼 2010'에서 옻처리를 한 아이폰 케이스를 선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우리 전통문화가 동서양, 현대사회에서도 통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자원이라며 현대화, 세계화를 강조했다.

채색옻을 입힌 피크닉통
"전통은 재현하는 데 그쳐서는 발전은 물론, 존립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령'은 지키되 시대의 문화와 호흡해야 합니다. 인간문화재들의 솜씨에 현대 작가들의 디자인이 결합한 21세기형 상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놔야 합니다."

김씨에게 귀국 후 공예를 하면서 어려운 점을 물으니,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병폐를 지적한다.

"유럽에서는 인맥과 학연이 통하지 않아요.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하지요. 한국은 그 점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한국의 과도한 명품 선호에도 일침을 가했다. 명품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유럽에서 실력 하나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김씨는 당당히 우리만의 전통문화에 기대를 건다. 한지, 옻 등 한국이 세계 최고인 것을 제대로 현대화하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지, 옻 공예를 현대화해 세계화, 브랜드화하는 게 소망입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 가능성을 경험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면 길이 열릴 거라고 봅니다."

김경신 공예가는…
1955년 서울생, 서울산업대학 산업 디자인과, 슈투트가르트대학 철학과 예술사, 포르츠하임 조형 예술대학 귀금속 및 금속공예 디자이너 석사학위, 하이델베르크 대학 예술사 박사과정, 코미테콜베르 국제디자인 공모전 1등상 수상, 독일 Baden-Wurttemberg주 주관 공예가 공모전 장려상 수상, 독일 공예작품전 공예대상 수상, 제네바 국제발명가 박람회 은메달 수상, 독일ㆍ유럽ㆍ한국 발명특허 획득(귀금속 표면주름기법), 독일ㆍ한국 발명 특허출원(종이 귀금속). 북촌 경신공방 운영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