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천운영 장편 고문기술자 이근안 사건 모티프로 선악 문제 감각적 문체로 그려

소설가 천운영이 장편 <생강>을 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사건을 모티프로 쓴 이 소설에서 작가는 선과 악에 관한 문제의식을 특유의 감각적 문체로 그리고 있다. 첫 장편 <잘 가라, 서커스> 이후 6년 만의 장편이다. 세 번째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이후 3년 만에 낸 소설책이다.

당신의 바닥, 나의 천장

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두고 혹자는 광주사태라고 말하고 혹자는 광주항쟁이라고 말한다.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이 사건을 대문자 역사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육하원칙의 세계는 명징하지만, 이 명징한 세계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석과 의미부여에는 인간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각자의 정서와 계급과 이해관계 속에서 현실을 경험하지만, 종종 그 경험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비롯된 자신의 가치관이 옳다고 확신한다. 때문에 필자는 ‘폭도’나 ‘열사’란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을 만날 때,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제 이념을 기준으로 세상을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고 응징하는 것만 같아서. 그 찌그러진 렌즈로 필자도 ‘스캐닝’될 것 같아서. 하지만 이 찌그러진 렌즈가 한때 사회보편적 이념이던 시절에 우리는 도대체 뭘 했을까? 볼테르의 말을 빌려 폭도 혹은 열사에게 응징을 가했던 사람에게도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것인가? 질문이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와 이 부분에 이를 때면 언제나 비틀거린다. 그리고 다시 불편해진다.

천운영의 장편 <생강>은 이 비틀거림으로 나아가는 소설이다. 여기, 두 남녀가 있다. 고문기술자 안과 그의 딸 선이다. 소설은 이 부녀의 목소리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가해자의 논리와 가해자 딸의 정서가 섞이며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국문학에서 닳고 닳은 고문이란 소재를 쓰며 작가가 꺼내 든 전략은 말하기 방식의 변화다.

“저도 1인칭 소설 많이 썼지만, 작가들이 자주 범하는 화자와 작가를 구분 짓지 못하는 것, 소설이 내면화되는 것에 그다지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2명의 화자와 화자의 내면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했어요. 그렇다면 그 단점은 확실히 극복하고 나가자고 생각했죠. 아버지와 딸의 목소리를 구분 지어야 하고, 그것이 자기변명으로 빠지는 일이 없도록 행동을 통해서 서사를 끌어가자. 소설 작법으로써 견지할 부분이라고 생각했죠.”

별 볼 일 없던 소시민 안은 어느 날 강도를 때려잡고 ‘용감한 시민’이 된다. 그리고 경찰이 되고, 경찰 우두머리의 하수인이 됐다가 공안수사의 달인이 된다. 김훈의 <남한산성>이 비극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경지를 보여준다면, 이 소설 1장은 악이 아름다움이 되는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칠성판이 뭔지 아느냐. 저승길에 지고 갈 하늘이시다. 북두칠성 고요하게 빛나는 하늘이시다. 아름답지 않으냐. 박달나무 널판으로 내가 직접 만든 것이다.(…) 칠성판 위에 누운 저놈은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처럼 온순하구나. 젖이라도 물고 싶은 얼굴 아니냐. 그렇다면 달콤한 젖을 물려줘야지 않겠느냐. 우선 물에 적신 거즈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주어라.’ (9페이지)

입지전적의 실적을 올리던 찰나, 시대가 바뀌고 그는 고문기술자로 낙인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가 숨은 곳은 다락방. 딸아이의 꿈이 담긴 곳이다.

안이 다락방에 숨기 전, 그의 딸 선의 세계는 이미 파국을 맞았다. 친구는 떠나고 첫사랑은 외면하며 기자와 피해자들은 그녀 주변을 맴돈다. 아버지가 고문해서 번 돈으로 먹고 입고 공부했으니 이 딸을 마냥 불쌍하게만 볼 일도 아니다. 세상사 경계 긋기란 이렇게 모호한 법이다. 그러니 어쩔 텐가, 그를 증오하면서도 지킬 수밖에. 그 가슴 속 응어리를 풀려면 피해자의 손이라도 맞잡는 수밖에. 달고 쓰고 맵고 아린 생강의 맛은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자 이 군상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생의 맛이다.

‘두려운 건 딱 하나예요, 아버지가 고문당할까봐, 그게 두려워요, 아버지가 그들에게 했던 것처럼. 고문을 당한다고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고문은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걸요, 잘 아시잖아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게 해드릴게요.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가위예요. 위협이라고 하겠다는 것이냐. 누우세요, 머리를 감겨드릴게요. 천장이 더럽구나. 당신의 바닥이기도 하죠.’ (259페이지)

당신의 바닥, 나의 천장. 소설은 이 다락방에 갇힌 10년의 이야기다. 아버지를 등에 지고 산 10년의 이야기다.

달고 쓰고 매운 생강의 맛

지난해 창비 블로그 ‘창문’을 통해 연재된 이 소설은 연재 이후 70~80% 대폭 수정해 출간됐다.

“문장을 고치고, 구성을 멋지게 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던진 질문에 대해서 답을 확인하는 작업이 오래 걸렸죠. 어떤 인간에 대해서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 의문이 생겼고, 그 의문을 푸는 데 중점을 뒀어요.”

작가의 나름의 해답을 그는 이렇게 써두었다.

‘그는 반성할 줄 몰랐고, 포악했고, 곰 같았다. 그에게 잡아먹힐까봐, 그의 목을 졸라 죽여버릴까봐, 그를 대신해 변명을 늘어놓을까봐, 겁이 났다. 그리하여 지난한 다락방 세월을 끝내고 나왔을 때, 내가 알게 된 것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281페이지, 작가의 말)

요컨대 고문기술자 안은 다락방에 있던 10년간 반성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안에게 고문피해자들은 악이었고, 개였고, 대의를 위해서 개들은 없어져야 마땅했고, 수사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반성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 출소 후 목사가 돼 ‘반공설교’를 하는 이근안의 소식을 접한 후 작가가 내린 결론이다. 연재 당시 소위 ‘열린 결말’을 보였던 소설은 13장이 추가되며 반전으로 끝난다.

“안이 얼마나 잔혹한 고문기술자인가가 무서운 게 아니라, 반성하지 않는다는 게 더 무서운 거죠. 자신의 믿음에 내적 논리를 만드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더라고요. 현재도 그것이 알게 모르게 많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죠. 그래서 마지막 장은 꼭 넣고 싶었죠.”

취재를 하는 데 1년, 연재와 연재 후 다듬는 데 다시 1년이 걸렸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다른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당연히 슬럼프란 말이 따라다녔다.

“내가 쓰기로 한 것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에 한동안 소설을 못 썼어요. 점점 기술만 늘어서 문장은 화려해지고, 어려워지는 것 같고. 이 소설은 이근안에 대한 어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소설을 어떻게 써야겠다’ 혹은 ‘나는 소설을 써야만 하겠다’는 확신을 주게 만든 소설이기도 하죠. 건강해졌어요. 이 소설 쓰고.”

앞으로 쓸 작품 구상을 몇 가지 들려준다. 두 번째 단편집 <명랑>에서 뻗어간 이야기부터 소리와 악기 장인에 관한 모티프까지 장편 3권은 될 분량이다. 작가는 “예전에 ‘대화를 잘 쓰고 싶다’, ‘캐릭터를 만드는 장치에 중점을 두자’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내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가 화두”라고 말했다.

“이제 기술도 있고, 내가 깨달은 것도 있는 가장 좋은 상태죠. 이 좋은 상태가 얼마나 갈까? 10년 정도라고 생각해요. 가능하면 산문이나 강의 줄이고 소설만 쓰면서 보내려고요.”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누구든 ‘아직도 고문 얘기?’란 냉소로 첫 장을 펼쳤다가 ‘역시 천운영’이란 생각으로 마지막 장을 덮을 테니까. 감각적 문체, 견고한 구성, 치밀한 문제의식. 천운영의 새 장편은 독자의 기대에 충분히 값하는 작품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