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대석] 목수 김진송 출간이야기 만들어 내는 기계 '움직인형' 통한 상상력과 논리의 만남 시범

경력 1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해명할 일이 생긴다. 자신은 주구장창 '목수'라는데 사람들은 '비평가', '저술가', '소설가', '종합지식인' 등으로 부르길 즐긴다. 김진송이 작업장에서 톱밥 뒤집어 쓴 모습을 봐야 "정말 목수였구나!" 한다. 그만큼 그에게 많은 역할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1900년대 초 매체의 기록을 재료 삼아 일상 속 근대 형성 과정을 밝힌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문화연구계의 사건이었다.

현대문명을 풍자적으로 해부한 <인간과 사물의 기원>, 신화와 역사를 넘나들며 진실의 경계를 탐색한 <가루부의 신화>, 1959년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집에 드나든 사람들과 선물 목록을 토대로 당시 사회상을 기술한 <장미와 씨날코>의 독창적 문제 제기는 여전히 독보적이다.

"하긴 우리 아이도 아버지의 정체성을 헷갈려했어요. 나무 다루는 사람이긴 한데 글도 쓰고, 때론 TV나 신문에 나오기도 하니까. 초등학생 땐 가정환경 조사서에 제 직업을 '자영업자'라고 적었더군요.(웃음)"

그에겐 만드는 일과 생각하는 일이 떨어져 있지 않다. 만드는 일을 통해 세상 이치를 깨치고, 공부를 나무에 투영하는 것이 생활이자 직업이다. 2001년 출간된 <목수일기>와 개정판인 2007년작 <목수 김씨의 나무 작업실>이 그 증거다. 이 책들을 통해 김진송은 지식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해 냈다.

"나무를 다루는 동안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지식과 정보의 형태와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무의 이름을 시작으로 가지와 잎과 꽃의 생김이며, 줄기의 주름 형태와 뿌리의 뻗음, 무늬와 결의 모양과 무르고 단단한 목질의 특성, 마르는 정도와 썩는 모양새, 베어야 할 시기와 건조 방법, 나무의 맛과 냄새, 그리고 꼬이는 벌레들과 그것들이 남기고 난 흔적 등등 알아야 할 지식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대부분의 지식은 사회적으로 공유되기 위한 체계나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았지만, 나무 다루기에는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었다."

'먹물'이 아닌 '경험'으로 습득된 이 지식들은 의자 만들기에만 보탬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 지식 구조의 틈을 사유하는 데도 쓰였다. '경험적 지식'에 비추어 보았을 때 '도서관 지식'의 한계는 명백했다.

제도에 의해 엄정히 구획되고 폐쇄성을 통해 권위를 누리는 지식은 일상적 생산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명분보다 쓸모를 먼저 떠올리는 목수의 습성은 김진송에게 '르네상스 지식인'이라는 평가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의 대표적 목물인 '게으름뱅이를 위한 텔레비전 시청용 두개골 받침대', '소파가 있어도 바닥에 앉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등받이', '자유로운 포즈를 위한 의자' 등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김진송은 상상력 역시 "경험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경험 없이 상상은 만들어질 수 없다. 아이들이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건 아이들의 빈약한 경험이 엉뚱한 연상 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력은 현실 속에서 창의적으로 전개되지 못한다.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논리와 보편성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적 인간이 되려면 상상력과 논리를 만나게 하라. 이 쉽지 않은 지침을 김진송은 '움직인형'을 통해 시범 보인다.

뱀이 방바닥에서 기어 나오고 해골이 침대 머리맡에서 고개를 내미는 악몽 때문에 잠을 설치는 아이, 책을 펼치고 그 안으로 풍덩 빠졌다가 돌아오는 아이, 관 밖으로 외출한 파라오와 가족 간의 끔찍한 비밀을 간직한 집….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상연되는 나무 장치들을 동화책과 기계학의 도움 없이 만들어 냈다.

인형을 움직이는 톱니바퀴들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고, 사람이 손으로 돌려야 움직이는 이 아날로그적 기계들은 최신 SF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더 흥미롭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움직임의 연쇄들은 보는 사람이 스스로 해석하도록 한다. 경험과 이성, 감정을 쏟아 부어 기계와 소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장치가 무슨 쓸모가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야기를 통해 소통하는 것은 인류의 근원적인 욕망이자 문명의 기초였어요. 현대에도 이와 관련한 많은 산업과 직업이 형성되어 있고요. 사실 이야기에서 밥도 나오고 떡도 나오는 겁니다.(웃음)"

최근 출간한 <상상목공소>에는 김진송이 '움직인형'을 만들며 적용하고 깨달은 바, 목수로서 성찰한 현대사회, 그리고 이 와중에 창의적으로 살아남는 법이 빼곡하다.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책이다. 이를테면, 1인 창조기업의 선구자가 물려주는 잠언 같다고나 할까.

'비밀의 집'(좌), '술 마시는 노인'(우)
"상상력은 구체적인 물질이나 아이디어의 영역에서 발휘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통찰은 지식과 경험이 윤리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4월 5일 남양주의 작업장에서 목수 김진송을 만났다.

오랜만에 책을 냈다. 물건 만드는 주기가 있고, 글 쓰는 주기가 있다던데 그 때문인가.

출판에 대해서는 좀 포기한 부분이 있다. 글을 써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책이 워낙 안 팔리니까. 목수 일당이 안 나온다. 쓰다가 그만 둔 책도 있다.

어떤 내용이었나.

목수로 살면서 도달하는 지점들이 있다. 나무와 톱에 관련한 어마어마한 경험적 지식과 만나는 지점인데 그걸 언어로, 과학적 지식으로 전환해보고 싶었다. 서구에서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가 나타난 것도 그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디드로의 백과사전 작업 같은 것 말이다. 이번 책에도 그런 내용이 포함되었지만, 다 쓰진 못했다.

'움직인형'은 언제부터 만들었나.

2009년부터 약 1년 동안 20여 점의 '움직인형'을 만들었다. 나는 이미지와 텍스트에 동시에 집착하는데, 그 둘을 통합할 방법을 찾았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계라니,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문장 조합 장치가 떠올랐다.

서구 역사 속에서는 이런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들이 자주 있었다. 데카르트가 죽은 딸을 그리워하며 만든 자동 인형, 보캉송의 기계 오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만큼 기계적 상상력, 과학적 삶의 태도가 일상화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기계들은 장난감이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묻는 매개이기도 했다. 이런 문화가 영화 <아바타>로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움직인형'을 만드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기계 문명의 초기 단계에 대한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이야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게 바로 논리성의 문제다. 서구와 달리 기계적 상상력이 없었던 한국의 이야기에 빠진 부분이기도 하고.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 영화들도 프레임 수가 아니라 감정에 따라 진행되지 않나. 한국에서 <아바타>가 나올 수 없는 이유다. 반면 '움직인형'들은 기계의 속도와 논리에 따라 흘러간다.

한국에서는 왜 기계적 상상력이 일상화되지 못했을까.

성리학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리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약했다. 자동 인형을 만든 사람은 장영실뿐이고 정약용의 실학도 후대에서야 인정받았다.

'움직인형'을 만들며 기계학을 공부했나.

아니다. 기계학 하신 분이 톱니바퀴의 지름과 나사 수 등을 일일이 계산했냐고 묻던데, 나는 맞물리는 톱니바퀴들 간의 적절한 비율만 생각했다. 일정한 공식을 적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무는 온도와 습도 변화에 따라 계속 늘거나 줄고, 그 정도도 종류에 따라 다르다. 게다가 나는 나무를 선택하기보다 있는 나무에 맞추어 작업하기 때문에 경험적 지식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경험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의 차이인가.

과학적 지식은 경험적 지식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경험적 지식 역시 자연적 지식의 일부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해바라기씨는 원래 피보나치수열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그걸 인간이 발견해 언어화한 것이 과학적 지식이다. 그러니 과학적 지식에 권위를 부여하는 현대사회의 지식 서열화는 왜곡된 것이며 폭력적이기도 하다.

폭력적이라니?

과학적 지식을 우위에 놓음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고가 공고해진다. 벌레나 꽃, 개와 고양이를 열등하게 여기고 타자에 대한 편견을 갖게 된다. 자연적 지식 앞에 겸손해지고 서열화된 지식의 경계를 넘나들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상상력을 넓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상상력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라는 말이 그런 뜻인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자의 시각으로, 벌레와 꽃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다. 예를 들어 보자. 비가 오는데 메뚜기가 뛰어 다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비를 맞고 있는 메뚜기가 불쌍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도 훌륭한 태도지만 자신이 메뚜기라고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무서워진다. 겨우 3~4개월 동안 사는 메뚜기에게는 비 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건이다. 게다가 빗방울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느껴지겠나.

우리가 눈을 가린 채, 혹은 휠체어에 탄 채 도시를 다녀 보면 도시가 장애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장을 바꾸는 능력이 곧 상상력이고, 이를 바탕으로 해야 현실에 보편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창의성이 발현된다.

그럼 근대적 제도를 통해 전문화된 지식들은 쓸모가 없단 얘긴가.

지식 자체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폐쇄성을 통해 지식에 권위를 부여해 온 제도적 방식은 비판한다. 열등한 집단일수록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에 의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야쿠자가 그렇고, 한국 지식인 사회도 그런 면이 있다. 얼마 전 불거진 서울대 음대 김인혜 교수 사건도 이를 증명한다.

창의적인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의 뛰어난 발상은 그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기본적 정보와 기술이 폭넓게 공유된 바탕 위에 상상력이 일상화된 문화적 환경이 필요하다. 사진 찍기를 예로 들어보자.

요즘은 카메라가 좋아서 사람이 초점과 심도를 조절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진의 기술적 완성도 이상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김진송의 '움직인형'

'비밀의 집'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하면 현관문이 열리고 갇혀 있던 비밀이 새어 나온다. 좀 스산하다. 바닥에는 머리와 팔뚝, 다리와 몸통으로 토막 난 사체가 흩어져 있고 의자 하나가 흔들거린다.

천장에 매달린 여자는 날고 있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다. 벽에는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 나와 있다. 앙상한 손이 튀어 나온 관 하나가 덜그럭거리고 두 아이가 머리를 내밀었다가 사라진다. 도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다시 닫힌 문 앞에서 세상의 모든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

'술 마시는 노인'

술을 따른다.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입을 벌리고 술잔을 입에 댄 다음 잔을 내린다. 잠깐 쉬고. 잔을 들어올리고, 입을 벌리고, 술잔을 털어 넣고, 잔을 내린다. 무슨 사연인지 노인은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는다.

손잡이를 돌리는 이상, 무한 반복. 가끔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개가 몸을 뒤챈다. 계획대로라면 노인은 술을 여섯 잔만 마시기로 되어 있었다. 그 이후에는 테이블로 고꾸라져야 했다.

하지만 결국 노인을 자빠뜨릴 장치를 고안하지 못해서 노인을 주구장창 술을 들이켜는 운명에 가두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기계적으로 불가능하면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