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 정민 한양대 교수다산이 초의선사에 茶 제조법 전수, 추사 꽃피워소장 자료 공개해 차 연구, 학문 활성화 기대

오늘날 차(茶)는 세계인의 기호식품으로 경제 자원이자 하나의 문화로 자리하고 있다. 이웃인 중국과 일본만해도 차 문화에 관한한 세계성과 고유성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의 차 문화는 어떠한가? 신라와 고려때 흥성했던 우리 차 문화는 조선조에 접어들며 멸절의 수준으로 내몰렸다가 19세기에 잠시 일어났지만 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차 애호가들은 무수히 늘었지만 실생활에서, 학문적으로 차 문화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게 현실이다. 이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체계적인 차 학문이 갖춰지지 않았고, 차학을 전공하는 전문인이 부족한 점을 들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릇된 차 문화가 범람하고 이권과 연계되면서 더욱 왜곡되는 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차 문화를 새롭게 정리하고 종래의 풍토에 일침을 가하는 역저가 모처럼 나왔다. 다산 정약용 연구의 권위자로 한문학에 조예가 깊은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가 펴낸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이다.

전체 752쪽 분량의 방대한 이 책은 실제 자료와 고증에 입각해 조선 후기 차 문화사의 종합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풍성한 새 자료들을 소개한다. 그간 차계의 수많은 오류를 바로잡아, 바른 안목을 제시했고, 모든 발굴 자료를 원본 그대로 공개해 만인이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정민 교수는 책에서 조선조에 들어와 멸절되다시피했던 차 문화가 18세기 들어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초의선사(1786~1866), 추사 김정희(1786~1856)에 의해 다시 일어났다고 밝힌다. 다산에게서 차를 배운 초의 선사가 추사와 교류하면서 차 문화가 서울의 문사(文士)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이는 다산이 초의선사, 혹은 아암 혜장 스님에게 차를 배웠다는 일반의 '통설'과 상반되는 것으로 정 교수는 "다산은 귀양 오기 전에도 차에 대한 식견이 높았으며, 초의선사가 1809년 다산초당을 처음 찾은 이후 다산의 학문과 인품에 빠져들면서 자연스럽게 차의 제법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다산이 1805년 만덕산 백련사에 놀러갔다가 주변에 야생차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아암 혜장 등 백련사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다산의 저술로 알려져온 조선 차 문화의 고전 <동다기>(東茶記)도 진도에 유배와 있던 이덕리(1728~?)의 저술이라고 발굴, 소개했다.

당시 다산, 초의, 추사가 마셨던 차는 어떤 형태였을까? 정 교수는 요즘의 녹차와는 다른 '떡차'였다고 밝힌다. 1830년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 떡차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온다. 삼중삼쇄, 즉 찻잎을 세 번 쪄서 세 번 말려 곱게 가루를 낸 후, 돌샘물에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크기의 떡차로 만들었다.

<부풍향차보> 원문
다산에서 초의로 전해진 차는 어떻게 차문화로 꽃피웠을까. 정 교수는 초의가 1830년 상경한 것을 계기로 박영보가 <남차병서>를 짓는 등 초의와 문사들 간에 교류가 이뤄지고 초의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차 문화가 급속히 확산됐다고 한다.

추사와의 인연 내지 역할이 궁금했다. "추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어요. 초의차를 맛본 추사는 차에 깊이 매료돼 초의를 회유하고 협박하고 구슬러서 차를 얻었어요. 또 차를 얻기 위해 글씨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었죠. 당대 예단에서 추사가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초의차의 명성도 덩달아 대단해졌죠."

책은 다산과 초의, 추사를 집중 조명하면서 차를 매개로 관계를 형성했던 주요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다. 초의는 1837년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의 요청으로 우리나라 차를 찬송한다는 제목의 장시 '동다송'에서 차의 역사 등을 정리하고 있다.

박영보의 스승인 신위는 초의를 시승(詩僧)으로 부르고 '남차시 병서'를 지어 초의에게 주었다. 이밖에 추사의 동생 김명희,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 신헌, 이규경 등 당대 지식인들도 초의와 직간접으로 교류했다.

책의 내용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박물관뿐 아니라 전국의 개인 소장자들에게서 빌려온 수많은 도판들은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동다기> 첫 면
또한 100페이지 분량의 부록은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참고 문헌을 광범위하게 소개했을 뿐 아니라 상세한 연표는 차 문화사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원문을 부록으로 실어 가독성을 높였다.

차 전문가가 아닌데 차에 관한 역저를 낸 계기, 또는 배경을 말한다면

"조선의 18세기 전문 연구자인데, 당시는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던 시기로 지식인의 역할은 지식을 생산하기보다 유효한 정보를 어떻게 실렉팅하고 입맛에 맞게 편집해 권위있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했다. 이것을 가장 잘한 사람이 다산이었는데 그러한 다산의 노하우를 정리해 2006년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란 책을 준비하던 중 그해 9월 강진에서 나온 다산의 편지를 보기 위해 갔다가 우연히 <동다기>를 만났다. 더구나 200년 동안 말로만 전해지던 <동다기>의 저자가 다산이 아닌 이덕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것을 글로 발표하면서 차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이후 우리 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조선 차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책을 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자료의 한계다. 조선의 차 문화는 우리 역사의 일부로서 국민에게 공개되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페쇄적으로 자료를 독점해 연구하는데 적잖이 힘들었다"

초의, 추사 이후 차 문화가 급격히 쇠락했는데

우리 차의 공급처가 사라졌고 당대 문사들과 교류하는데 초의 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초의가 차를 만들었지만 수요에 턱없이 부족했고, 초의처럼 차도 생산하며 시문이 가능한 인텔 리가 이어지질 않았다. 추사의 비중은 말할 것도 없고.

책을 내면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빠진 게 있다. 예를 들면 '샘물론' 같은 물에 관한 것인데 모아놓은 자료 파일이 날아가는 바람에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또 차의 폐해에 관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인의 차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또 부수적인 자료들도 있는데 분량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 다음에 낼 생각이다"

책의 말미에 우리 차 문화에 관해 종합적인 연구를 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신라와 고려에 관한 차 문화가 정리돼 있다고 하지만 총체적 얼개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밝혀야 할 부분이 엄청나게 나올 것이다. 또 신라와 고려시대 차 문화를 정리하면 조선시대 차 문화가 왜 그런 지경이 됐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우리 차 문화사의 얼개를 언젠가는 정리해보고 싶다"

우리 차 문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동안 우리 차 연구에 힘쓰신 분도 있지만 오류가 있는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인문학적 지식이 부족해 차 애호가 수준에 머문 경우도 많다.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우리 차 문화가 확립되고 발전하려면 학문적 연구와 함께 생활화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렇다.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첫 출발인 <부풍향차보>를 보면 7가지 약용차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부안 같은데서 이를 개발해 고급 7종차를 출시하면 우리 차도 알리고 지역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