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 TV & 극단 샐러드 박경주 대표 인신매매성 국제 결혼한 이주여성의 죽음 담아

"어떤 여성이 맘에 드세요? 취향대로 골라보세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 물어보세요."

여러 명의 여성이 유혹의 춤을 추고, 한 남자가 중앙에서 그녀들을 바라본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은밀한 성매매 여성 경매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보니, 이 장면은 성매매가 아닌 중매결혼 시장을 빗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자는 한국말을, 여자는 영어로 말한다. 국제결혼이다.

중매쟁이는 쇼처럼 분위기를 띄우는 사회자가 되어 언어가 통하지 않는 두 남녀의 통역자 역할까지 맡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곧이곧대로 말을 옮기지 않는다. 극단 '샐러드'의 신작 <란의 일기>의 일부다.

"당신 부자인가요?, 직업은 뭐죠?" 외국인 여성의 질문에 남자는 "일용직 노동자이고, 부자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중매쟁이는 "부자이고, 사장이랍니다"라며 결혼을 성사시킨다.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두 남녀는 부부가 되어 한집에 살지만 언어마저 통하지 않는다. 신뢰와 배려는 찾기 어렵고, 폭력과 강압적인 성행위, 그리고 긴장과 두려움만이 그들을 감싼다.

극단 샐러드의 극작과 연출을 맡고 있는 박경주 대표는 '존경받지 못한 죽음 시리즈'의 3번째 작품으로 <란의 일기>를 꺼내들었다. 지난해 시작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은 1960~70년대의 산업역군이었던 한국인 파독 광부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 <당신은 나를 기억하는가>였다.

연극 '란의 일기'
독일에서 사진과 영화를 전공하며 '이주'와 관련한 작업을 해오던 박 대표는 파독 광부의 억울한 죽음과 처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시 독일로 외화벌이를 위해 '수출된' 고학력의 광부들과 간호사는 최빈국이던 한국의 경제 개발 쌈짓돈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과 고된 노동력의 대가는 잊히고 말았다. 박 대표는 죽은 파독광부를 불러내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죽음 시리즈'의 첫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이후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보고서 <여수 처음 중간 끝>과 인신매매성 국제결혼을 하는 이주여성의 죽음을 담은 <란의 일기>로 이어졌다. 이 시리즈는 4편을 끝으로 완결된다.

2005년, 인터넷 독립 미디어 다문화방송국 샐러드TV(www.saladtv.kr, 구 이주노동자방송국)를 설립해 이주문제 전문 취재로 활동해온 그녀가 4년 후 다문화 공연 극단 샐러드를 창단해 이주의 문제를 공연예술로 풀어내는 것은 샐러드TV에서 못다 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제가 쓴 작품은 모두 로서 관심 있게 다뤘던 사건들이에요. 2~3주가량 밀착 취재해오면서 기사로 다 쓸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이주노동자의 죽음을 취재하면서, 장례식장에서 먹고 자면서, 자료도 많이 모았지요. 하지만 경찰 조사가 끝나고 유족들도 한국을 떠난 상태여서 진실을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상태였죠. 그것을 연극이란 장치를 통해 전달한 거죠."

<란의 일기>는 국제결혼 후, 경산시에서 한 달 만에 추락사한 쩐띠 란이라는 이주 여성을 모델로 하고 있다. 국내에는 잘 다뤄지지 않았지만 베트남 인터넷 신문을 드나들면서 베트남에서 떠들썩한 사건이 된 것을 안, 박 대표가 경산의 시민단체에 제보해서 알려졌다.

란의 사망을 경찰이 자살로 간주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던 친구 차우가 우연히 란의 일기를 발견하면서 <란의 일기>의 이야기는 풀려간다. 여기에 나오는 차우는 곧 박 대표의 또 다른 자아다.

실제로 그녀는 쩐띠 란의 일기를 입수해 샐러드TV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어로 번역했다. 공연에는 여러 사건이 섞이고 허구가 더해졌지만 공연 마지막에 낭독되는 란의 일기는 거의 원형 그대로다. 필리핀, 몽골, 키르기스탄에서 온 이주민으로 구성된 극단 배우들은 대본을 받자마자 눈물을 쏟았다.

"누군가는 다른 이야기를, 피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극단 샐러드와 샐러드TV를 운영해오고 있다는 박 대표. 그녀는 굳이 '죽음'을 통해 이주 문제를 이야기는 하는 이유에 대해 '행복한' 다문화로 치장하는 방송과 영화의 모습에 반기를 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대규모 이벤트처럼 거품은 많아졌지만 정작 다문화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요즘, 꿈 같은 판타지가 아닌 그야말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유학 당시 네오나치로 인해 지독한 충격을 받았던 박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도 종종 지독한 나치즘을 목격한다.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나치즘이 숨어 있는 사회죠. 조금만 달라도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다른 것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니까요. 큰 집단에 속하지 못하면 소외당하는, 아주 무서운 곳이죠. 제가 하는 죽음 시리즈는 결국 한국 안의 나치즘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어떤 평가를 받기보다 시간이 흐르고 활동이 쌓여 밑거름이되기를 바란다는 박 대표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이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는 '통합 교육 사업'을 꾸준히 해보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는 극단 샐러드가 한국 내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에요. 단원들도 그만큼 성장해야 하고요. 올해 하반기나 내년 초에는 대학로에서 한 달 정도 공연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