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 선생' 윤성호 감독아리랑 TV 프로젝트 일환 대구세계육상경기 맞춰 '무한도전' 찍어

20대 중반, 여성, 유원지 아르바이트생으로 키만 멀쑥한 원식이 장대높이뛰기에 입문한다. 룸메이트 우정과 헤어진 후 가슴앓이를 하던 것이 계기였다.

마음을 돌리려면 "뭔가 크고 높고 늠름한 것"을 보여 달라는 우정의 요구에 하필 생각난 게 장대 짚고 그녀의 옥탑방으로 뛰어오르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전영록 코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20대 초반, 여성, 초등학생 때 육상선수였으나 성장이 저조해 장래희망을 아이돌 스타로 바꾼 재영이 장대높이뛰기에 복귀한다. 연습실까지 찾아온 전영록 코치에게 감동해서도, 장대높이뛰기의 김연아로 만들어주겠다는 그의 약속을 믿어서도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동참하고 있다. 엉뚱한 훈련 방식에 대들면서도 은근히 재미있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이 미상, 남성, 군필자이자 금욕주의자, 채식주의자로 위험하지는 않지만 수상한 전영록 코치가 장대높이뛰기에 애정을 쏟는 이유는 확실치 않다. 검정 뿔테 안경 뒤에 비밀을 감추고 직접 발굴한 꿈나무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친다. 이미지 트레이닝, 애니멀 트레이닝, 게슈탈트 트레이닝 등으로 이어지는 나름의 훈련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성과는 장담할 수 없다.

<도약선생>은 이상 세 명의 인물들이 저 높고 푸른 하늘을 향해 좌충우돌 가는 영화다. 행여 장대높이뛰기라는 생소한 종목과 스포츠영화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긴장했다면,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은하해방전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등을 통해 한국 영화에 없던 재치와 기지, 유머를 도입한 윤성호 감독의 신작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장대높이뛰기를 동경하되, 결코 비장하지는 않게, 꿈에 한참 못 미치는 형편을 자학하지도 않은 채, 당장 가능한 훈련에 최선을 다하며 나아간다. 우여곡절이 많지만 꾸준한 건 그 태도다. 스포츠는 물론 삶을 대하는 건강한 태도. 일등과 성공에 집착하고, 치열한 경쟁과 자기 계발을 빙자한 자기 학대가 당연해진 현실 속에서 점점 희귀해져 가는 태도다.

"장대높이뛰기로는 우리 집안의 계급을 바꿀 수 없다"는 재영에게 전영록 코치는 강조한다. "장대높이뛰기의 목적은 높은 곳,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신을 만나 답을 듣고 내려오는 것"이라고. 원식이 드디어 장대를 들고 우정의 방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에서 영화는 잠깐 멈추고, 묻는다. "이쯤 되니 내가 애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건지,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애정을 길어 올리는 건지 헷갈렸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와중에 모두가 김연아가 될 이유는 절대 없다는, 즐겁고도 충실하게 각자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면 '파이팅'이라는 깨달음이 온다면 성장담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남들이 앞을 보고 달릴 때, 나는 하늘을 보고 달린다"는 대사가 마음에 꽂혔다면, 신념이 아니라 명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곧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언젠간 장대높이뛰기의 아름다움을 담는 제대로 담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윤성호 감독을 만났다.

장대높이뛰기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는?

<도약선생>은 한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아리랑TV의 프로젝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시작했다. 대구를 배경으로 올해 열리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육상이라는 소재를 가미해줄 것을 제안 받았다. 마침 여자 장대높이뛰기의 팬이기도 했고, 말없이 행위로만 전개되는 스포츠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선택했다.

말없는 스포츠 영화라니, 결과물과 다르다.

제작비와 기간 등 현실적 여건이 전혀 따라주지 않았다. 장대높이뛰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는 나중에 시도하기로 하고, 이번엔 견적에 맞춰 '무한도전' 찍듯 찍었다. 스펙터클은 '구강액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장대높이뛰기의 팬이었다고?

최윤희, 임은지 선수의 경기를 챙겨볼 정도다. 장대높이뛰기 자체도 아름답지만, 선수들 몸이 완벽하다. 달리기의 수평 운동에너지를 도약을 통해 수직 운동에너지로 바꾸고 장애물까지 넘어야 하는 복합적인 과정이라, 몸의 거의 모든 근육이 쓰이는 것 같다. 최윤희, 임은지 선수는 얼굴까지 예쁘다.(웃음)

이미지 트레이닝, 애니멀 트레이닝, 게슈탈트 트레이닝 등은 실제로 있는 건가?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가? '무한도전' 찍듯 찍었다니까.(웃음)

장대높이뛰기 평가에 예술점수가 반영된다는 설정 하에, 선수들의 감수성을 길러주는 시 트레이닝까지 진행되는데.(웃음)

좀 더 황당무계에 욕심을 냈으면 패션 트레이닝까지 넣었을 거다. 전영록 코치 역을 맡은 배우 박혁권이 직접 쓴 시 '우리 함께 가보자'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파아란 높은 가을 하늘./ 그곳,/ 그곳,/ 그 아무것도 없는 곳'(웃음)

배우 박혁권에게는 '윤성호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럼 전영록 코치도 감독을 본뜬 인물인가?

박혁권 씨가 한 말이 정확한 것 같은데, 그냥 페르소나가 아니라 열성 페르소나라고.(웃음) 전영록 코치는 영화감독들, 예술을 해도 혼자 못하고 사람들을 끌어들여 판을 벌려야 하는 기획자들의 캐리커처 같다. 자기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일단 "우리 5년 안에 칸 가는 거야, 할리우드 가는 거야"하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편집해주신 분이 "나는 전영록을 이해한다"기에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 봤더니 "과거 상처가 커서 헛소리를 자주 하는 거 아니냐. 감독들 다 그렇다"고 대답하더라.(웃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중 한 장면도 그에게 녹아 있다고 밝혔는데.

한 백만장자가 아들에 대해 상담하자 신경정신과 의사가 '성도착'이라는 진단을 내리는데 그 부적절한 대상이 속옷도 양말도 머리 냄새도 아닌 유토피아라는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은 전영록 코치의 장대를 남성성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는 하늘 높이 올라가 공기 한번 쐬고 오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

같은 배우들과 꾸준히 작업한다. 의리를 지키는 건가?

내가 왜 영화를 계속 할까, 라는 질문에 대해 대의명분을 내세워본 적도 있었지만(웃음) 이제는 답이 좁혀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없는 이야기 지어내 영상에 옮겨 공감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재미있다. 그래서 박혁권, 박희본 씨 등은 은인이기도, 인생 파트너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에 첫 출연한 나수윤 씨와도 앞으로 잘해볼 생각이다. 아예 매니지먼트 회사를 하나 차린 셈치고.(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