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백가흠 세 번째 단편집 출간8편의 단편 작가적 개성보다 고민, 변화의 모습 보여줘

소설책 앞에선 독자는 고양이 같다.

진중한 이야기는 촌스럽고, 지적인 소설은 지겹다. '누구 가르쳐?' 그렇다고 가벼운 소설을 고르려하면 책 읽을 시간이 아깝다. '이럴 거면 영화를 보지.' 그래도 아쉬워서 몇 권을 짚어드는데, 읽고 나면 '별로'라며 던져버린다.

이 고양이 달래며 제 소설 읽게 하는 방법도 작가마다 제각각인데 백가흠의 방식은 대략 이런 거였다.

'아, 왜 또?' (단편 '힌트는 도련님' 중에서)

요컨대 그는 무대포로 밀어붙인다. "나는 문학주의자"라고 우기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하는 게 극서사(극단적 상황을 설정한 이야기)잖아요."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은 대개 폭력적 상황에 던져진 남자들이고 이들은 헌신, 폭행, 강간, 신성모독 등의 방식으로 제 사랑을 표현한다. 예컨대 그의 등단작 '광어'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임신시킨 남자에게 돈을 받아 술집에서 그녀를 빼내 함께 떠날 것을 꿈꾼다. '루시의 연인'의 남자는 사고로 장애인이 된 후 루시라는 자위용 섹스 인형과 정신적 사랑을 나눈다.

극단적 이야기지만 영 어색한 건 아니다. 촘촘한 구성, 세밀한 언어는 이 작가의 소설을 자꾸 읽게 만든다. 소설책 초판 3000권을 소화하기 힘들다는 최근의 출판시장에서 그의 소설집 두 권은 만 부 가까이 꾸준히 나갔고 첫 창작집은 얼마 전 개정판을 냈다.

소설가 백가흠이 세 번째 소설집 <힌트는 도련님>을 냈다. 2001년 등단해 이제까지 단편집 3권을 냈으니 전업 작가치고 꽤 과작한 셈이다. 표제작 속 '도련님'은 백 작가 자신의 별명.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뜻하는 이 말은 낡고 우스꽝스런 느낌을 준다. 8편의 단편이 이와 꼭 닮은 것은 아니지만, 이전 두 권의 책보다 의뭉스런 유머가 돋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는 "소설 쓰는 패턴이 좀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때 소설이 들어왔다

작가를 만난 날, 그는 명지대 수시전형 심사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는 이 대학에서 박범신 작가에게 사사했고, 대여섯 개 대학에서 소설창작론을 가르치며 소설을 쓴다. 한때 창비 기획위원으로 출판사에서도 일했다.

방학이면 집필실을 찾아 지방에서 작업하는데 올 여름에는 전성태, 박상 작가 등과 몽골에 다녀오느라 한달쯤 작업실을 비웠단다. 이들과 조만간 앤솔로지를 낼 생각이라고.

"낙타 처음 봤는데, 그때 알았죠. 단편('그때 낙타가 들어왔다')잘못 썼구나….(웃음) 내 소설에서 낙타는 피상적이고 문학적인데, 실제 낙타는 무섭고 성질도 더럽더라고. 덥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서 성격이 더러운데 그걸 몰랐어요."

이렇게 부산떨고 하느라 그가 작품을 적게 쓴 건 아니다.

"제가 쓰는 게 극서사잖아요. 거의 한계에 다다른 인물들이고. 그동안 소설 잘 써야겠다는 강박증도 심했고요. 발표작이 어떤 수준 밑으로 떨어지는 걸 스스로 참지를 못했어요. 제가 펑크 왕이었거든요. 그래서 청탁이 싹 끊겼던 때도 있었어요."

이전 두 권의 단편을 내면서 꽤 심한 우울증에 빠졌던 작가는 이번 소설책을 내면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단다. 기자는 그가 세 번째 단편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첫 번째 장편소설을 엎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이 책보다 첫 장편 <향>이 먼저 나오려고 했어요. 원죄를 다룬 내용이었는데 공을 많이 들였어요. 배경인 동남아를 7번을 다녀왔는데…. 교정 3번 보고, 작품해설도 받았고. 근데 발간 열흘 앞두고 엎었어요. 대신 이 단편집을 먼저 내기로 했는데,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기자는 앞서 말한 '그때 낙타가 들어왔다'가 이번 단편집 중 제일 좋았다고 말했고, 작가는 "그래, 그 정도가 좋다니까"라고 화답했다. 키가 작아 슈트도 줄여 입어야 하는 150센티미터의 이혼남을 쓴 이 단편은 '이게 문학이다'라고 던지기 보다는 '이런 이야기도 있지'라고 슬며시 내미는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감추는데 능숙한 건데, 그렇게 잘 쓰는 사람들은 너무 많아. 나는 그들처럼 잘 쓸 수가 없어, 그럼 내가 가진 적나라한 걸로 승부를 거는 거지…. 종종 말해요. 소설은 잘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걸 쓰는 거라고. 근데 이제 조금 바꿔보고 싶은거죠. 그 작품이 그런 거에요."

힌트는 백가흠

이전 두 권의 단편집이 작가적 개성을 날것으로 드러냈다면, 세 번째 단편집은 작가적 고민,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표제작 '힌트는 도련님'과 단편 '그래서', 'P' 등은 소설가 소설의 형식의 빌어 작가의 고민을 드러낸 작품들. '힌트는 도련님'은 소설 쓰기의 한계에 이른 소설가가 1인칭으로 등장, 자신이 탄생시킨 인물들에게 되레 압박을 받는 등 소설 쓰기의 여러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래서'는 무서운 독서편력을 지닌 늙은 비평가 앞에 젊은 소설가 '백'이 나타나며 벌어진 이야기다.

책을 쌓아 서재의 입구를 막고 스스로를 영원히 책 속에 유폐시키는 늙은 비평가는 글쓰기와 독서의 무거움과 공허함을 동시에 환기시키는 인물. 이 노인 앞에 그가 젊은 날 가르쳤던, 지금은 죽은 소설가 백은 나타나 줄이 바뀔 때 마다 글씨가 사라지는 고통스런 글쓰기를 반복한다.

"예전에는 문학적 욕망이 굉장히 컸거든요. 누군가 내 소설을 사회소설로 보던데, '내가 투철한 의식으로 썼나?'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어요. 그때는 그렇게 보여지고 싶고, 그게 내 소설의 장점으로 보인다는 걸 얍실하게 알고 있었죠. 요즘에는 그런 욕심이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제 내가 잘 쓰고 편안한 걸 하고 싶어졌어요. 소설이 어떤 사회적 시스템과 결부돼 읽힐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개인적으로 읽힐 수도 있다는 걸 근래 이 책 내고 알았어요."

한결 가벼워진 이야기를 읽고, '이 작가가 이렇게 책을 묶은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던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은 두 번째 장편 '나프탈렌'을 신나게 쓰고 있단다.

노인을 주인공으로 죽음과 소멸에 관한 주제를 다루지만, "땅 밑에 착 가라앉은 것 같다"고. 무거운 주제를 일상적으로 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역시 백가흠식 멜랑콜리가 깃들테지만 말이다. 낙관적 기대보다 냉소적 진단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최근의 문학계에서 그의 작품을 기대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터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했던 말을 좋아하거든요. 두 번째 위치(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와 세 번째 위치(고통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것)에 대해 갈등하는 것. 손택이 탁월하게 분석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사실 작가의 눈인 것 같아요."

인터뷰 후 손택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문학적 비평방식으로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하는 그녀의 책을 작가는 그렇게 읽었나보다. 헌데 이 말을 소설로 쓸 수 있을까? 그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고양이도, 변덕만 부리는 건 아니니까.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의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