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의 개인전 연 토탈 아티스트 임옥상물, 불, 철 등 5개의 자연 재료 이용한 60여 작품 선보여

태초의 자연인 듯 강렬한 색채의 꽃이 전시장에 만발했다. 10미터에 이르는 캔버스 두루마리에 그려진 꽃과 꽃망울. 원시림의 원초적 생명력이 고요한 미술관을 흔들어 깨운다.

호수를 정하지 않고 작품을 그려낸 작가는 "크기가 정해진 캔버스가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느낌이라면, 두루마리 캔버스는 대양에서 헤엄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임옥상 작가의 8년 만의 개인전은 이렇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한국 민중미술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그는 지난 8년간 공공미술에 힘을 쏟았다. 줄곧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오던 그가 실천적 예술행위로서 사회의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나선 것이다.

서울 마포구의 하늘공원(월드컵 공원)에 자리한 '하늘을 담는 그릇'도 그의 작품이다. 기존에 알던 전망대는 사방이 막혀 있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구조를 가졌지만 그는 바람과 햇살, 빗방울, 소리, 풀, 그리고 하늘까지 사람과 어우러지게 했다. 사람만을 위한 전망대가 아닌 자연과 사람 모두를 위한 이 공간은 공공미술에 대한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임옥상의 토탈아트'전(8월 26일~9월18일)에서 선보이는 60여 점은 대부분 신작이다. 물, 불, 철, 살 흙 등 다섯 개의 자연의 재료를 이용한 전시에는 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매체는 물론 그 표현의 방식 또한 상당히 방대하다. 매체의 확장과 더불어 그의 사유 역시 자유를 찾았다.

"미술에서 다루는 물질이 제한되면 상상의 폭도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림으로 표현하던 것에서 나아가 돌과 흙, 철을 접하고 표현하게 되면서 상상력의 비약적인 확장이 일어났어요. 생각과 표현이 훨씬 더 자유로워졌지요. 모든 재료는 서로 통하지요. 결국엔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흙에서 시작하게 되니까요."

그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흙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스스로 숨을 쉬며 습기와 건조함을 다스리는, 땅에서 나와 다시 탈 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작가 왈) "웰빙시대의 예술"이라 할 만한 흙 예술은 굽지 않는 이상 전시장에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 매체였다. 하지만 그는 단지 굳히는 과정만을 거쳐 새로운 흙 예술을 선보였다. 담벼락처럼, 벤치처럼 혹은 작은 방처럼 건축의 기법을 적용해 탄생했다.

블랙박스 혹은 작가의 방처럼 만들어진 두 개의 마주 본 큐브. 하나의 큐브 속엔 그의 작업 노트가, 또 다른 큐브 속엔 잔잔한 물결의 음영이 속을 채운다. 큐브의 겉모습 또한 다르다. 하나는 흙이 채 마르기 전, 벽 전체에 열 개의 손가락으로 좌우대칭의 근사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또 다른 하나엔 덩어리 진 흙이 여기저기에 거칠게 붙어 있다.

"블랙박스 안에 기록된 모든 것은 사실이고 진실이잖아요. 난 흙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흙은 지구의 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살 속에 모든 역사와 문명을 기록해왔지요. 그러니 지구의 블랙박스라고도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재료로 일종의 작가의 방처럼 만들고 싶었어요. 천정이 뚫려 있으니, 위를 보면서 자기와의 대화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큐브 안에는 작가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열성과 호기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누구든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 좀 더 가까이에서 진하게 작품을 느낄 수 있다. 큐브 옆으로 '흙살'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작품이 자리한다.

세 개의 흙 담벼락에 각각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가족들, 여론 메이커들의 얼굴을 앞뒤로 촘촘히 새겨 넣었다. 그런데 뒷면을 보면 수많은 얼굴 위로 거대하고 기묘한 얼굴이 새겨져 있다.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쯤 되는, 실제로 존재할 법하지 않은 이 형상은 구체적인 무엇을 말한다기보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포용과 연민, 애정, 윤리라는 단어보다 나를 앞세우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고, 교조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모습이 이 시대에 너무 팽배해있잖아요. 일부러 실제 존재하지 않는 형상을 만들었어요. 사람의 모습만이 정답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모습 역시도 세상엔 존재할 가치가 있고, 그런 존재들과 공존할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그것이 흙의 정신이고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어요."

그는 이런 의미에서 완성된 작품이 아니더라도, 흙 한 삽을 떠다 놓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메두사의 머리를 한 오바마와 빈 라덴. 그들 머리에서 요동치는 수십 마리의 뱀에는 그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적혔다. 가령, 미 대통령인 오바마에겐 '정의', '도덕', '신자유주의', '돈' 등이 영어로 적혔고, 빈 라덴으로 상징되는 아랍에는 '평화', '지하드' 등의 단어가 새겨졌다.

오바마가 빈 라덴을 사살한 후 내지른 일성 "정의의 승리다"라는 한마디에 일필휘지로 드로잉을 해 철 작업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마치 물그림자처럼, 전시장 벽면에 위아래로 설치된 그 둘을 통해, 결국 그들이 서로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벤타코리아와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의 일환으로, 공기청정기의 폐품을 재활용해 공기청정을 시도하는 역설, 불교의 표시인 '만'(卍)자가 뒤에서 보면 나치의 표식(卐)이 되는 아이러니, 광화문은 붉은 물속에, 일본 열도는 푸른 바다 속에 긴장감 넘치게 잠기게 하는 블랙 유머가 전시장 곳곳에 흐른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아끼는 '산수'에는 그가 고민하는 단어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도, 시간, 역사, 정언, 정도, 뜻, 길. 처음도 끝도 없이 펼쳐진 산수는 이런 고민을 모두 끌어안을 듯 호방하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