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내 이빨 중에서 14대가 가짜예요. 그동안 3~4년에 걸쳐서 임플란트로 해 박은 겁니다. '이빨 깐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젠 내 이빨이 아니라 그런지 '구라'도 옛날 같지 않아요. 자꾸 버벅거리고… 유창하게 나오질 않아."

소설가 황석영은 5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19번이나 단식 투쟁을 했다. 그랬더니 속은 좋아졌는데 칼슘이 몽땅 빠져나갔나 보다. 석방돼서 보니 이가 엉망이었다. 그 좋던 '이빨'이 무뎌졌다. 요즘처럼 날렵하고 빠른 디지털 시대에는 자기 같은 '아날로그'는 더 이상 '이야기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도 '구라'다.

소설 '장길산'을 10년 동안 연재할 때 한국일보 기자들이 붙여준 '구라'라는 별명이 문단으로 번져 오래 전부터 '황구라'로 통한다.

조선엔 3대 '구라'가 있다. 백구라, 방구라, 황구라.

'방배추'란 별명으로 통하던 '협객' 가 20대 초반 어느 날 '지식 청년'과 함께 했다. 이 물었다. "자네 주먹 좀 쓴다는데 몇 명이나 상대할 수 있나?" "뭐, 그저 한 삼십명 정도…"

방동규
이 벌떡 일어나 방배추의 '싸대기'를 날렸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삼천 명이나 삼만 명은 상대해야지 겨우 삼십 명이야. 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꺼져."

주먹 꽤나 쓴다던 는 그 날 이후 을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신다.

1970년대 유신 독재로 답답하던 시절, 문인들은 청진동에 자주 모였다. 어느 날 청진동 이모집에서 '원맨쇼' 대결이 벌어졌다. 문단의 알아주는'구라' 황석영과 재야의 걸쭉한 '구라'가 한번 붙어야 한다고 김정남(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문수석) 등이 부추겼다. 문인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을 하던 또래들이 30~40명 모였다. '구라 대결'은 다수결의 판정에 의해 황석영이 졌다.

조선의 3대 구라 중 최고는 역시 민족 대서사적 '구라'인 '백구라'. 구라의 서열이 매겨졌다.

1995년 9월 첫 광주비엔날레가 열렸다. 광주 출신으로 한국일보를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태홍이 문화계 인사를 초대해 술자리를 만들었다. 평론가 염무웅이 함께 자리한 '방배추'를 자극하려고 "이제 구라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백구라'는 민중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뒤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 더 이상 구라를 풀 수 없고, '황구라'는 교도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니 '구라'를 풀고 싶어도 풀 수 없게 됐으니 '구라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또 했다. "지금 중원에서 신흥 '구라'들이 물 밀듯이 나오고 있는데 '라지오'가 좋다"고 덧붙였다.

방구라 왈 "앞장 선 놈이 누구냐?"

광주 비엔날레에 큐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는 유홍준을 가리키며 염무웅 왈 "저기 와 있네."

방구라 왈 "쟤가 무슨 라지오냐. 인생이 없으니까… 쟤는 '교육방송'이야."

모두가 배를 잡고 넘어갔다. 조선의 3대 교육방송은 그렇게 정해졌다. 1대 이어령, 2대 김용옥, 3대 유홍준.

소설가 황석영의 옥바라지를 하던 화가 홍성담이 면회를 와 들려준 이야기에 '황구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창호기자 cha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