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이죠. 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에요."

고희(古稀)를 눈 앞에 둔 소설가 황석영(68)은 한국일보와의 인연을 한마디로 표현한다. 그리고 올해로 창간 47주년을 맞는 '주간한국'에 대한 감회도 또렷하게 이야기한다.

"주간한국은 출발할 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좋은 매체라고 평가했어요. 문예 취향이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주간한국은 1964년 9월27일 첫 호를 냈다. 그리고 47년, 올해 10월31일자로 통권 2396호를 맞아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 앞 상상마당에서 황석영 작가와 특별 인터뷰를 가졌다.

황석영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 동안 대하소설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했다. 무명 신인에 가까웠던 서른두 살의 젊은 소설가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를 만났고, '장길산'은 생명력을 얻었다. 마침내 황석영은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98년 3월 공주 교도소에서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황석영(오른쪽)이 시인 고은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다.
'장길산'은 1972년 10월 유신에 이은 독재 체제, 10·26사건, 12·12사태, 5·18광주 민주화 운동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궤를 같이하며 이어졌다.

- 소설 '장길산'은 어떻게 신문 연재를 하게 됐는지요.

"원래 중편 정도, 1권짜리 의적 소설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시놉시스를 당시 '문학사상'을 맡고 있던 이어령씨에게 보여줬더니 '이거 탐나지만 간단하게 처리할 게 아니라'며 한국일보를 소개해 줬어요. 얼마 후 이영희 문화부장에게서 '사주가 만나고자 한다'며 연락 온 것이 인연의 시작입니다."

- 사주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라고 했더니 대뜸 '얼마나 쓸 수 있겠냐'고 하시더니 '우리하고 길게 해보자'는 겁니다. 내 소설을 모두 읽어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하신 겁니다. 그래 자료 수집하고 연구하는데 6개월에서 1년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무슨 소리냐'며 '두달 줄 테니까 하라'는 거에요. '다른 것은 우리가 모든 지원을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집 반 채 값 정도 되는 돈까지 자료 수집비 명목으로 내놓았어요."

1974년 7월11일 한국일보에 연재된 '장길산' 첫 회. 김기창 화백이 삽화를 그렸다.
가난한 문인들 사이에 소문은 빨랐다. '황석영이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졌고, 문인들의 아지트였던 서울 한복판 청진동으로 몰려 들었다. 술자리가 시작됐다.

- 자료 수집에 써야 할 돈이었는데.

"악귀 같은 문인들이지요. 기다렸다는 듯이 떼거지로 모이더니 결국 수유리 쪽에 있던 '니나노집'으로 옮겨 일주일 정도 술판이 이어졌어요. 이 놈이 빠지면 저 놈이 오고… 결국 술값으로 자료수집비를 몽땅 탕진하고 말았어요. 눈 앞이 캄캄했지요."

사상계에 '실의'란 작품으로 등단했던 한남철을 비롯해 방영웅, 김승옥, 이문구, 천승세 등. 심지어 조선일보 기자였던 허술까지도 합류했다. 몇 날 며칠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선배들을 위해 내의를 사다 나르는 후배 문인이 있을 정도였다.

황석영은 염치 불구하고 다시 한국일보사를 찾아갔다. 이번엔 담당 부장을 거치지도 않고 비서실에만 이야기한 채 곧바로 사주를 만났다.

1984년 7월5일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의 연재를 끝낸 뒤 황석영이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완간 기념회에서 무당 춤을 추고 있다.
- 뭐라던가요.

"'진척이 있느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이야기했어요. 가난한 문우들과 술 먹느라고 다 날렸다고. '이해는 하지만 한꺼번에 날리면 어떻게 하냐'며 또 돈을 주시면서 '꼭 자료비로 쓰라'고 당부했어요. 그러더니 문화부 담당 기자를 불러 규장각 자료는 모두 사진으로 찍어 정리해 보내라고 지시하더군요. 그리곤 당신의 명함에다 술집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주며 '친구들과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그 곳에 가서 내 앞으로 달아놓고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어요. 그러나 너무 미안해서 그 술집은 한번도 가지 않았어요. 놀랄 일이 또 있었어요. 바둑 대국장으로도 유명한 인사동의 운당여관 특실을 잡아주곤 글 쓰는 일에 매달려 보라고 했어요. 대단한 분이었어요. 그런 배려가 없었으면 '장길산'은 출발도 못했을 겁니다."

마침내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은 1974년 7월11일부터 신문 연재를 시작했다. 조선 숙종 때의 실존 인물 장길산을 중심으로 모인 광대들의 공간에서 반봉건 운동이 펼쳐지고, 그 안에 민중들의 삶과 투쟁을 그려냈다.

연재는 쉽지 않았다. 황석영은 그 해 11월15일 청진동 귀향 다방에 모인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 한 뒤 18일 고은(대표 간사), 신경림, 염무웅, 박태순, 조해일, 황석영이 6인 간사를 맡아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반유신 독재 투쟁에 앞장 섰다. 시인 김지하 등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 종교인, 학생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언론·출판·집회·신앙·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에겐 이들은 '눈엣가시'였다. 감시가 심해졌고, 활동에 제약이 많아졌다.

'장길산'은 그 뒤에도 몇 차례 중단 위기를 맞았다.

- 참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장길산'을 시작하면서 도회지 출신으로서 많은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농촌과 전통 사회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전남 해남으로 내려갔어요. 원고를 제대로 보낼 수 없을 때는 해남 우체국에서 전화로 불러주곤 했어요. 문화부 기자들도 고생 많았어요. 광주 항쟁과 맞물려 '현대문화연구소'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할 때는 이 도시 저 도시로 도망 다니다시피 떠돌았는데 그 때마다 이름 모를 시민들이 제 원고를 한국일보까지 배달하는 일도 있었어요."

-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나중에 그 때 문화부 기자였던 김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약속된 시간까지 원고가 신문사로 도착하지 않아 고생했다는 거에요. 수소문해보니 휴가를 끝내고 귀대하는 군인에게 원고 배달을 부탁했는데 이 친구가 귀대 시간이 촉박하자 그냥 소속 부대인 국방부로 들어갔던 거지요.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김훈 기자가 부랴부랴 한밤중에 국방부를 찾아가 주번 사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잠 자던 사병을 깨워 원고를 받아왔다 더군요. 욕도 많이 나오고, 여자들이 받아 쓰기에 거북한 문장도 많은 제 원고를 전화로 불러주면 받아쓰던 우계숙 등 여기자들은 주변 동료들이 하도 놀려서 여러 번 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다 고생시켰죠."

이제는 '허허' 웃으면서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정말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당국의 감시를 받던' 소설가의 원고를 챙겨야 했던 기자들이 오죽했으면 '황석영의 구라는 언제 끝나는 것이냐'고 했을까.

마침내 대하 역사소설 '장길산'은 1984년 7월5일 2,092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현암사에서 전 10권으로 완간했다.

'황구라'란 별명은 기자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고, 그것이 문단에 전해지면서 굳어졌다.

황석영은 지금도 술 한잔 하고 잠든 밤이면 6·25 전쟁 통에 텅빈 도시에 홀로 남아 있는 꿈, 중고생 시절 시험 볼 때마다 아무 것도 써내려 가지 못하는 꿈과 함께 '장길산 원고에 얽힌 꿈'을 꾼다고 한다. '세 가지 꿈'은 죽는 날까지 잊히지 않을 상처이자 강박 관념인 것이다.

-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이어 확대 개편된 민족문학작가회에서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표현의 자유가 너무 극악하게 제한 받던 시대에 작가의 책무라고 할 수 있어요. 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 바로 작가잖아요. 특히 역사소설은 무엇을 썼느냐보다 어떤 때 쓰여졌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황석영은 1989년 민족예술인 총연합회 대변인 자격으로 북한의 조선문학예술 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한다. 그 후 5년여 동안 '망명자'로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등을 떠돌았다. 1993년 귀국하자마자 구속 수감돼 7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 방북, 망명, 수감 등 고난이 계속됐습니다. 분단 극복은.

"젊은 사람들에게 '분단 극복'이니 하는 소리는 낡은 이야기이고, 통일은 관념적으로 먼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현재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통일은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현 상황의 변화는 코 앞에 있는 일이지요.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어요. 엄연히 우리는 분단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아직도 나를 '종북좌파 빨갱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나는 조직적이지도 못하고, 이념적으로 투철하지 않아요. 자유주의자일 뿐입니다. 방북은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한 사회의 터부나 억압받는 것을 무너뜨려 상식화시키고, 대중화시켜야 합니다. 금기시하는 것이 억압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작가입니다. 작가는 민족의 주술사 같은 거예요."

- MB 정부가 들어선 뒤 대통령과 함께 중앙아시아 순방 길에 올랐던 것은.

"제가 방북한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어요. 현 정부가 보수정권이지만 북한하고 뭔가 진전된 관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노무현 정부 때부터 6자 회담과는 별도로 남북한과 몽골, 중앙아시아 5개국이 경제 문화권을 형성하면 분단 극복을 위해 또 다른 면에서 유효하지 않겠냐는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접근했고, 북에도 의사를 타진하니 양쪽이 모두 좋다고 해서 움직였던 거예요. 결과적으론 기회주의적 희망으로 그쳤고, 유라시아에 동행한 이후 좌우 양쪽 어떻게 두들겨 맞았는지 양 볼이 다 방방해졌어요."

- 남북 관계의 해결 방법은.

"중도적 입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신념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념의 스펙트럼이 너무 극과 극이라 개인이든,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중도를 표방하고 실천하기가 무척 힘들어요. 움직이는 것,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늘 균형을 잡으려 합니다. 지금은 집권 세력이 급격하게 우향우를 하니까 저는 좌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상식이 설 자리가 없어요. 선(善)한 상식이 서있는 사회가 '열린 사회'입니다. 상식이 바로 서야 진보와 보수가 양립할 수 있고 대화를 통해 발전적 가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황석영은 얼마 전 신작 '낯 익은 세상'을 발표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어긋난 시간 속에서 사람과 물건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쓰레기장을 배경으로 한 원주민과 이주민의 세계, 도깨비 세상과 산업 사회의 모습을 통해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황석영은 1962년 경복고 재학 시절 단편 '입석부근(立石附近)'으로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내년이면 등단 50주년이다. 19세기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이야기꾼의 일생을 그려가는 새로운 작품의 구상을 마무리한 상태다. '여울물 소리'란 제목도 정해 놓았다.

"제가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했던 만큼 등단 50주년의 마무리도 한국일보와 함께 신문 연재로 하고 싶네요. 문학 인생의 방점을 찍는 거지요. 그 후부터가 저의 '만년 문학'이 시작될 겁니다."



글=이창호기자 cha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