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도 닌텐도'라는 다소 허황된 꿈을 꾸던 젊은 사업가가 마침내 그 꿈의 완성을 눈앞에 두게 됐다. 1998년 전자상가가 밀집한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닌텐도 게임기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모여선 것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김정주 NXC 회장은 당시 "반드시 닌텐도를 이기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14년 전 품었던 김 회장의 꿈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넥슨재팬을 일본증시에 상장, 시가총액 기준으로 닌텐도의 턱밑까지 추격했던 김 회장은 이번에 '다중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이하 MMORPG)의 명가인 엔씨소프트의 최대주주에 올라서며 스스로에게 한 '타도 닌텐도' 약속을 지키게 됐다.

엔씨소프트 최대주주 올라선 넥슨

넥슨 일본법인인 넥슨재팬은 엔씨소프트의 설립자이자 CEO인 김택진 대표로부터 엔씨소프트 지분 14.7%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고 지난 8일 공시했다. 넥슨이 사들인 주식은 김 대표의 지분 24.7% 가운데 일부로 넥슨은 엔씨소프트의 주식 321만8,091주를 주당 25만원에 인수했다. 총 투자금액은 8,045억원이다. 이번 인수로 김 대표는 9.99%(218만8,000주)를 보유, 2대 주주가 됐다.

넥슨의 엔씨소프트 지분 인수는 철저한 보안 아래 진행됐다. 지난 7일 최종 결정이 났음에도 양사 모두 사내 임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외부로 알려지지 않게 했다. 8일 공시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핵폭탄급' 충격에 휩싸였다. 국내 게임업계 매출순위 1, 4위를 차지하는 양사의 결합은 시장의 향후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까닭이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김 대표는 이번 주식 매각과 관계없이 엔씨소프트 대표이사직을 수행할 것"이라며 "21일로 예정된 신작 '블레이드앤소울'의 공개테스트도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인수에 대해 게임업계 내에서는 여러 '설(說)'들이 분분하지만 가장 힘을 받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닌 양사가 서로의 지분을 공유, 함께 사업을 만들어감으로써 글로벌 시장을 돌파할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김 대표가 엔씨소프트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서로의 장점이 어우러져 두 회사가 협력하여 글로벌 파고를 넘어가는 모험을 떠나고자 한다"며 "앞으로 양사는 글로벌 시장을 함께 공략하는 데 노력을 집중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탁월한 M&A로 회사 키워

넥슨의 엔씨소프트 지분 인수로 가장 주목된 인물은 김정주 NXC 회장이었다. 그동안 탁월한 M&A 능력을 뽐내며 회사를 업계 정상에 올려놓은 김 회장은 이번 엔씨소프트 지분 인수로 '신의 한 수'를 뒀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68년에 태어난 김 회장은 광성고를 마치고 일본 조치대 국제학 과정을 수료했다. 김 회장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1991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계산학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김 회장은 26살이 되던 1994년, 학위보다는 좋아하는 게임으로 창업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고 단칸방 사무실에서 넥슨을 설립했다.

김 회장이 세운 넥슨은 1996년 MMORPG '바람의 나라' 유료서비스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그동안 텍스트 기반이 주였던 MMORPG를 그래픽 기반으로 재탄생시킨 '바람의 나라'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바람의 나라'는 세계 최장수이자 최초 상용화 MMORPG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누적회원수 1,800만명으로 여전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김 회장은 이어 캐주얼 게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크레이지 아케이드 비앤비', 국민게임이라 불리던 레이싱 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 카트라이더' 등 손대는 게임마다 승승장구하며 게임업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크레이지 아케이드 시리즈로 재미를 본 김 회장이 넥슨을 키웠던 방법은 미래가 유망한 중소 게임회사들을 인수, 탁월한 신작을 선보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될성부른' 게임회사를 알아보는 김 회장의 안목이 주효했다.

김 회장은 '메이플스토리'를 만든 위젯스튜디오(2004년)를 시작으로 '던전앤파이터'를 개발한 네오플(2008년), '서든어택'을 개발한 게임하이(2010년) 등을 인수하며 기업규모를 키워왔다. 그 결과 넥슨은 매년 40%씩 성장, 지난해 국내 게임업계 최초로 매출 1조원대를 돌파(1조2,000억원)했다. 이는 세계 최대 게임회사인 블리자드의 절반에 육박한다.

김 회장은 2006년 회사를 스튜디오 체제로 개편하고 NXC(넥슨홀딩스)를 설립하면서 넥슨재팬 등 일본법인을 중심으로 사업 부문을 재편했다. 김 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NXC가 넥슨재팬을 지배하고 넥슨재팬이 다시 넥슨코리아, 넥슨아메리카, 넥슨유럽 등을 지배하는 구조다. 그동안 순수 자체 자본으로 회사를 키워왔던 김 회장이지만 이때부터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김 회장이 넥슨을 한국이 아닌 일본 증시에 상장할 것이라 예상했다.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김 회장은 결국 넥슨재팬을 일본 도교증권거래소에 상장한다. 지난해 말 상장된 넥슨재팬의 시가총액은 8조원대였고 일본 게임회사 가운데에서는 닌텐도에 이어 2위, 전체 상장기업 가운데 127위의 규모를 자랑했다. 국내 기준으로 살펴봐도 시가총액 기준 게임회사로는 1위, 전체 37위의 규모다.

넥슨재팬의 상장으로 김 회장은 부인 유정현 NXC 이사의 지분을 합쳐 상장 당시 3조원대의 자산가가 됐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에 이어 국내 3번째의 주식부호로 떠오른 셈이다. 이번에 엔씨소프트까지 품에 안은 김 회장은 이제 명실상부한 글로벌 게임시장의 대부로 자리 잡게 됐다.

자유분방한 은둔의 경영자

김정주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로 통한다. 1위 게임회사인 넥슨의 오너로 국내 게임업계를 좌지우지하고 있지만 정작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는 까닭이다. 2007년 회사 빌딩 밖 주차장에 차를 대려고 하다 외부인으로 인식한 경비원에게 제지당하고 개발 사무실에서도 쫓겨났던 일화는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김 회장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넥슨을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기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을 배우거나 카이스트에서 특강을 하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지만 회사의 중요한 결정은 직접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부 임원들이 넥슨을 코스닥에 상장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좀 더 규모를 키워 일본 증시에 상장하자는 결정을 내린 것도 김 회장이었고 이번 엔씨소프트 지분 인수도 김택진 대표와의 회담을 통해 직접 결정했다.

느긋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몸소 돌파구를 찾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학교폭력, 학습능력 저하 등의 주원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게임규제법까지 발의되자 김 회장은 사회공헌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으로 비난을 불식시켰다. 김 회장은 게임산업협회가 매년 70억원 이상의 기금을 마련해 '게임 역기능 해소'에 활용하기로 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기도 하고 장애인 표준사업장인 넥슨 커뮤니케이션즈를 설립, 지역 사회공헌도 실천하고 있다.

게임이라는 디지털 업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김 회장은 아날로그적인 삶을 산다고 알려져 있다.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이용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을 선호하고 인터넷 뉴스보다는 종이신문을 이용하는 편이다. 온라인 게임회사의 대표이면서도 보드게임을 즐긴다고 전해진다. 연극과 뮤지컬, 출사 등 젊은 문화를 체험하기 좋아한다는 김 회장은 공연장을 자주 찾기도 하고 아예 연극단에 참여해 연극을 만든 경험도 있다. 때때로 코엑스 행사장을 통째로 빌려 사원들을 위한 공연행사를 계획하기도 한다.

라이벌 김택진 대표

김정주 회장의 최대 라이벌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다. 김 회장과 김 대표는 서울대 1년 선후배 출신으로 친분이 두터운 데다가 각자 자기 분야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인 까닭에 게임업계의 라이벌로 불린다.

김 회장과 마찬가지로 김 대표 또한 게임업계에서는 살아있는 벤처신화로 불린다. 김 대표는 서울대에 다니던 1989년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와 함께 국내 대표 문서편집 소프트웨어인 '아래아한글'을 개발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박사학위 과정 중인 1997년 자본금 1억원을 들고 엔씨소프트를 설립했다.

창업 이듬해인 1998년 9월, 김 대표가 처음으로 선보인 '리니지'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2년 만에 700만명의 회원수를 돌파했다. 이후 '리니지2', '아이온'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 김 대표는 2010년 엔씨소프트를 코스닥에 상장, 벤처신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게임업계의 라이벌이지만 두 사람의 스타일은 정반대다.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김 회장과 달리 김 대표는 여전히 개발자로 신작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김 회장의 넥슨이 M&A를 통한 성장방식을 고수하며 다양한 분야의 게임을 내놓는 데 반해 김 대표의 엔씨소프트가 MMORPG 외길만을 고집하는 것도 정 반대다.

함께 글로벌 1위 모색하나

엔씨소프트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김정주 회장의 추후 행보가 어찌 될지 업계 관계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가장 무게가 실리는 주장은 블리자드의 '디아블로3' 등 외산 게임회사들의 압박이 심한 요즘, 양사가 서로의 지분을 나눠갖고 글로벌 게임시장 정벌에 나선다는 내용이다.

넥슨과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각각 매출액 1조1,916억원, 6,089억원 영업이익 5,343억원, 1,351억원을 올렸다. 시가총액은 넥슨과 엔씨소프트가 각각 8조5,000억원, 5조9,000억원 내외를 기록하고 있다. 합병 형태가 아닐지라도 두 회사가 전략적으로 함께 나설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규모만 커지는 것이 아닌 게임 라인업도 다양해진다. 넥슨이 '크레이지 아케이드 카트라이더, '던전앤파이터', '서든어택', 메이플스토리' 등 다양한 장르의 캐주얼 게임에서 강세를 보이는 반면 엔씨소프트는 '리니지', '아이온', '블레이드앤소울' 등 MMORPG에 특화돼있다. 넥슨이 아시아 시장에 집중하고 있는데 반해 엔씨소프트는 북미ㆍ유럽 등지에 올인하고 있는 것도 양사의 시너지 극대화를 예상케 한다.

일각에서는 김 회장과 김 대표가 글로벌 게임업체를 공동 인수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특히 M&A의 대가인 김 회장은 소량이지만 야후, 블리자드 등 글로벌 IT 기업의 주식을 취득했던 적이 있고 EA처럼 넥슨보다 덩치가 큰 회사에 대한 인수도 계획했었던바 있다.

어느 쪽이건 엔씨소프트 지분 인수라는 이번 결단은 '신의 한 수'라고 불릴 정도로 김 회장에게 큰 이득이 될 전망이다. 그동안 십수 차례의 M&A를 통해 회사를 키워온 김 회장이 역대 가장 큰 파트너와 손잡게 된 지금, 이후 행보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정계진출설등 다양한 소문 '부동산 집중투자'추측도
■ 앞으로 김택진 대표는…
김정주 NXC 회장에게 자기 지분의 14.7%(321만8,091주)를 넘기며 8,000억원을 손에 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일까?

게임업계를 뒤흔든 이번 딜에서 사람들은 '김 대표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내놓았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엔씨소프트의 부채비율은 1분기 말을 기준으로 28.2%밖에 되지 않는다. 현금 및 단기유가증권이 5,300억원에 달하는 터라 현금이 급하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다. 신작인 '블러드앤소울'의 출시 지연으로 영업이익이 떨어지고는 있지만 시가(26만8,000원)보다 낮은 25만원에 주식을 넘길 사업적 이유는 전혀 없는 셈이다.

이러한 까닭에 업계 관계자들은 정계 진출설, 부동산 투자설 등 다양한 측면에서 김 대표의 이후 행보를 점치고 있다. 이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김 대표의 정계 진출설이다. 김 대표는 그동안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유력한 대선 주자로 꼽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마찬가지로 젊은 층에서의 인기가 상당한 까닭이다.

안 원장과는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 민간 위원으로 활동한 경력도 있고 정치색도 비슷하다. 김 대표는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 기간 동안 모든 게임 서비스를 중단하고 직접 서울역사박물관에 마련된 분향소에 들러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만약 안 원장이 대권 도전을 선언할 경우 실무진으로 안 원장을 보좌할 가능성이 있다.

부동산 투자설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높다. 김 대표와 부인 윤송이 엔씨소프트 부사장은 지난해 부동산 투자자문회사인 '저스트알'의 지분 74%를 확보, 최대주주에 올라섰다. 김 대표와 윤 부사장은 지난해 10월 성남 판교 신도시에 지상 12층 규모의 R&D센터 신축에 나섰고 지난달 24일에는 서울 삼성동 엔씨소프트 본사 맞은편에 있는 경암빌딩을 사들였다. 이처럼 부동산 투자에 적극적인 상태라 대규모 투자를 위한 자금 확보차 지분을 매도했다는 의견도 힘을 받고 있다.

앞의 두 예측에 비해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김 대표가 운영 중인 프로야구단 NC 다이노스 운영에 집중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일부 야구팬들을 중심으로는 "김 대표가 확보한 8,000억원으로 류현진과 같은 특급 선수들을 영입할 것"이라는 희망에 가까운 소문이 돌고 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