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요한 대통령직 인수위 국민대통합 부위원장5대째 한국서 생활 가문 전주서 나고 순천서 자라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 지난해 특별귀화 한국인"박 정부, 동서·남북 화합과 다문화 가정 포용해야… 호남 발전 적극 지원 필요"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기구였던 '100% 국민대통합위원회'에서 부위원장으로 활약했던 귀화 외국인에게 또다시 중책을 맡겼다. 공식 직함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말이 외국인이지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전라도 순천 '촌놈', 눈을 감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듣고 있노라면 외국인일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남자. 5대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인요한(54) 의학박사다.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남 순천에서 자란 인 박사(미국명 존 린튼)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1895년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에 건너오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자녀들을 포함하면 '인요한가(家)'는 5대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새 정부 출범에 앞서 중요한 미션(임무)을 부여받은 인 박사는 대통합위원회의 과제에 대해 "동서 화합과 남북 화합, 다문화 가정의 포용을 이뤄야 한다"며 "박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던 48% 등을 잘 끌어안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고 중책을 맡은 소감을 밝혔다.

인 박사는 이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아버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힘들게 한 측면이 있고, 경제적인 면에서 호남의 발전이 더딘 점도 중요한 문제"라며 "역사적인 문제와 관련해서는 호남 분들이 잊지는 말되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경제적인 문제는 앞으로 호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요한(오른쪽) 박사가 지난해 3월21일권재진 법무장관으로부터 대한민국 국적증서를 받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진짜 한국인, 당선인과는 13년 전에 인연

한국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인 박사는 연세대 의대를 나온 전문 의료인이다. 인 박사는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를 지낸 의사다. 전라도 토박이임을 자처하는 인 박사는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통역을 맡기도 했고, 1987년에는 서양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190㎝가 넘는 거구에 사람 좋은 넉넉한 인상을 가진 인 박사가 '진짜 한국인'이 된 것은 지난해 3월21일. 법무부는 인 박사에게 특별귀화 허가를 내리기로 하고 대한민국 국적증명서를 선물했다. 그 전까지 인 박사는 미국 시민권자였다.

특별귀화는 본인 또는 배우자, 직계 존ㆍ비속이 정부에서 훈장이나 포장을 받는 등 특별한 공로가 인정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행된다.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만 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하더라도 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인 박사의 가족사를 보면 미국명 존 린튼보다 한국명 인요한이 훨씬 더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인 박사의 외증조부는 유진 벨로, 1895년 전남 나주에 첫발을 내디딘 후 선교, 의료봉사, 교회와 학교(목포 정명여학교, 광주 숭일고교, 광주 수피아여고 등) 설립 등에 앞장섰다.

인요한(왼쪽 박사는 지난 2010년 10월 27일 적십자 인도장 은장을 수상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인 박사의 조부인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은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린트은 한남대 설립자이기도 하다. 인 박사의 부친인 휴 린튼(한국명 인휴)은 한국전쟁 참전 후 순천에 결핵진료소를 세워 의료봉사를 펼쳤고, 198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의료인 본업에 충실했던 인 박사가 박근혜 당선인과 만난 것은 13년 전이었다. 당시 인 박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온 박 당선인에게 "어머니가 희생됐는데 어떻게 만나고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 당선인은 "국가 일은 국가 일이고 가족 일은 가족 일"이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인 박사는 그런 박 당선인이 굉장히 인상 깊게 느껴졌다고 한다.

2011년 말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시절 박 당선인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정중히 거절했던 인 박사는 지난해 10월 새누리당의 국민대통합위원회에 합류해 박 당선인의 선거 유세를 도왔다.

대북 지원 사업 그리고 쓴소리

왼쪽부터 이참, 하일, 이자스민, 박노자
한국 사랑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인 박사 역시 한국 사랑이라면 둘째갈 수 없다. 특히 인 박사는 북한을 자주 방문해서 적극적인 의료지원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 박사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이름을 딴 유진벨재단(회장 인세반)의 인도주의적 대북 지원활동에 적극 참여해 1997년에는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지원했다. 인 박사는 지금까지 20여 차례나 북한을 찾아 무료진료, 앰뷸런스 기증 등 의료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인 박사는 지난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인 박사가 특별귀화 허가를 받아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도 선대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 덕분이다.

인 박사는 '발명가'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인 박사 자신도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인 박사는 "우리나라에 내가 개발한 구급차 5,000여대가 있다. 아버지께서 제대로 된 구급차가 없어 호송 중 돌아가시면서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랑이 유별난 인 박사는 한국 사회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선교사의 후예인 인 박사는 몇 해 전 CBS TV에 출연해서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너무 화려해졌다. 화려해지면 화려해질수록 교회는 망한다. 교회는 어느 정도 핍박을 받으며 성장해야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고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인 박사는 이어 "교회 안에 교육관을 짓거나 리모델링을 하거나 대리석을 세우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교회를 확장하고 단장하는 대신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며 "뛰어나가 소외된 이웃들을 돌봐야 한다. 그것이 교회 본연의 모습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비판했다.

"별장처럼 고립된 미국보다는 살 비비고 사는 한국이 더 좋다"는 인 박사이지만 "예전에 비해 요즘 한국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 박사는 "순천에 살 땐 여러 동네가 모두 하나의 공동체였다. 누가 군대에 가고 누구 네가 무슨 날인지 서로 다 알았다"면서 "지금 우리에겐 입을 것, 먹을 것들이 99% 이상 채워졌지만 1%의 인간성은 잃어버렸다. 아파트에선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 서리했던 기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며 씁쓸해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는 정치, 경제, 사회, 복지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즐비하다. 그들 속에 파란 눈의 한국인 인요한 박사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또 한국사람보다 한국 사랑이 더한 인 박사이기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외치는 '100%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과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 인요한 박사는

출생: 1959년 12월8일

가족관계: 부인 이지나씨와 1남2녀

학력: 연세대 의대-고려대 대학원, 계명대 대학원

연세대 의학박사

주요경력: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부총재,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소장,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교실 주임교수,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선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100%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귀화 성공시대'는 계속된다
공기업 사장·방송인·국회의원·교수·프로 선수…



대한민국에 정착한 귀화외국인들 중 '성공시대'를 연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수, 공기업 사장, 국회의원, 방송인 등 분야와 직책도 무척 다양하다.

귀화외국인 중 최고위직에 오른 이는 이참(60) 한국관광공사 사장이다. 독일 태생인 이 사장의 본명은 베른하르트 크반트. 1986년에 귀화한 뒤 주로 방송인으로 활약했던 이 사장은 2007년 이명박 대선후보의 캠프에 합류해 한반도 대운하 특보를 지냈고, 2009년에는 한국관광공사 최초로 외국계 한국인 사장이 됐다.

하일(52ㆍ미국명 로버트 할리)도 성공한 귀화외국인의 대표선수로 손색이 없다. 인요한 박사가 전라도 촌놈이라면 하일은 부산 자갈치다. 하일은 부산사람보다 더 능숙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하일은 1997년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귀화했고, 미국 성 할리를 한국식으로 바꿔 하일로 다시 태어났다. 광주외국인학교 이사장이기도 한 하일은 영도 하씨의 시조다.

프랑스 노르망디 태생의 이다도시(45ㆍ여)도 한국사람 중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다도시는 1992년 연세대 한국어학당 학생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으며 이후 특유의 수다스럽고 빠른 말솜씨로 스타덤에 올랐다.

필리핀 출신의 이자스민(36ㆍ여)은 1996년 한국인과 결혼해 EBS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의 강사로 얼굴을 알렸다. KBS '러브 인 아시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더 유명해진 이자스민은 영화 '의형제'에도 등장했다. 방송과 영화 출연으로 대중과 가까워진 이자스민은 지난해 4ㆍ11 총선 때는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받아 금배지까지 달았다.

왕종연(31ㆍ여)은 한국여자야구클럽 최초의 외국인 등록 선수이자 첫 귀화 국가대표 선수다. 다롄 태생인 왕종연은 중국 소프트볼 국가대표였다.

왕종연은 지난 2003년 한국으로 유학 온 것을 계기로 야구와도 인연을 맺었다. 야구 입문 이후 한국에 푹 빠진 왕종연은 2008년에 귀화했으며 이후 한국여자야구 국가대표 선수로 맹활약했다.

축구의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던 신의손(44)은 본명이 발레리 사르체프로 타지키스탄 출신이다. 지난 2000년 한국에서 활약하는 외국인선수 중 최초로 귀화를 결심해 화제를 모았던 신의손은 구리 신씨의 시조가 됐다.

축구선수인 이싸빅(41)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투즐라 출생이다. 2004년에 귀화한 이싸빅의 본명은 데니스 락티오노프로 국내프로축구 수원 삼성, 성남 일화 등에서 활약했다. 이싸빅은 성남 이씨의 시조다.

학계에서도 귀화외국인은 얼마든지 있다. 안선재(72) 서강대 명예교수는 영국 출신이다. 본명이 브러더 앤서니인 안 교수는 한국의 시와 소설을 번역해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신문 칼럼 등으로 이름을 알린 러시아 출신의 박노자(41)는 2001년에 귀화했다. 박 노자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호사카 유지(58)는 일본 출신으로 2003년에 귀화했다. 유지는 현재 세종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근ㆍ현대 한일 관계, 독도 영유권 문제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명성을 쌓고 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