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박3일 일정 세번째 방한 빌 게이츠박 대통령·국회의원·CEO 등과 만나 '국제 원조·차세대 원전 개발'등 폭넓은 의견 주고받아세계 최고의 부자에서 세계 최고의 자선사업가로 변신 향후 행보 전 세계가 주목

연합뉴스
'컴퓨터 황제', 'IT업계의 구루(큰 스승)', '세계 최고 갑부'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며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빌 게이츠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 이사장이 한국에 왔다. 2001년 10월, 2008년 5월에 이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의 초청으로 지난 20일 방한한 빌 게이츠는 박근혜 대통령부터 서울대학교 학생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로 돌아갔다. 2박 3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국제원조', '차세대 원전' 등 그가 던져주고 간 화두는 묵직했다.

각자에게 맞는 메시지 전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빌 게이츠답게 이번 방한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박근혜 대통령,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서울대학교 학생, 삼성그룹 경영진 등 국내 각계각층의 내로라하는 사람들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눈 것이다.

20일 늦은 밤 전용기편으로 한국에 도착한 빌 게이츠는 이튿날 서울대학교 강연으로 방한일정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학교를 자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이유를 묻는 말에 "변화하는 세상에서 흐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라 답하며 한국의 젊은이들도 도전정신과 혁신에 대한 열망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서울대학교 강연을 마친 빌 게이츠는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이동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등 삼성그룹 임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IT업계 현안과 향후 전망 등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빌게이츠(오른쪽)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 이사장이 22일 청와대를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22일 오전에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특강을 열고 '스마트 원조'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는 "한국은 국제 원조를 받는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변한 유일한 국가"라며 "이런 경험을 살려 어떻게 세계에 기여할 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날 열린 윤 장관과의 면담에서는 "원자력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가격이 저렴한 에너지원"이라며 차세대 원전인 '진행파 원자로(TWR)'에 대해 설명했고, 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는 '창조경제'를 뒷받침할 생태계 조성 방안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이처럼 빌 게이츠는 한국에서 만난 사람 각자에게 맞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최연소 억만장자 대열에 올라

빌 게이츠의 본명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William Henry Gates Ⅲ)다. 빌 게이츠는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의 유명 변호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H. 게이츠 2세와 교사출신의 어머니 메리 게이츠 사이에서 1955년 10월 28일 태어났다. 공립초등학교를 마친 뒤 명문 사립중고등학교인 레이크사이드스쿨에 입학한 빌 게이츠는 13세 때 자신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이 많음을 깨달았다.

빌 게이츠가 2년 선배이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창업자인 폴 앨런을 만난 것도 레이크사이드스쿨 재학시절이다. 빌 게이츠가 17세가 되던 해에 두 사람은 첫 회사인 'Traf-O-Data'를 설립하고 시내 교통량을 기록ㆍ분석하는 소형 컴퓨터를 만들었다. 하버드대학 2학년인 19세의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나온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했다. 컴퓨터 혁명을 이끈 거대한 소프트웨어 제국의 시작이었다.

빌게이츠(오른쪽) 이사장이 22일서울 아산정책연구원을 방문, 정몽준 이사장과 환담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프트웨어 시장에 첫발을 들였지만 회사 경영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무분별한 불법복제 때문에 'BASIC' 프로그램 수입이 생각처럼 많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급계약을 맺은 MITS가 매각된 이후에는 프로그램의 저작권을 놓고 법정싸움까지 벌여야만 했다.

지지부진하던 마이크로소프트가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80년에 찾아왔다. IBM이 계획 중이던 개인용 컴퓨터(PC)의 운영체제 개발을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에 맡긴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빌 게이츠는 'MS-DOS'를 개발, IBM이 선보인 PC 사업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이후 2년 동안 50만대 가까이 판매되며 하드웨어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IBM PC 성공에 힘입어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도 PC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더한층 성장한 것은 'MS-DOS'의 뒤를 잇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운영체제인 윈도를 발표하면서부터다. 특히, 1995년 발매된 '윈도 95'로 빌 게이츠는 세계 PC 시장을 거의 독점하게 됐다. PC 시장의 확산에 힘입어 발매 나흘 만에 전 세계적으로 100만개 이상이 팔린 '윈도 95'의 대성공으로 빌 게이츠는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13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독점 기업인으로 비난받기도

빌 게이츠에게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윈도 체계로 전 세계 PC 시장을 좌지우지했던 빌 게이츠는 독점기업인이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아야만 했다. 어떤 소프트웨어든 윈도 운영체제 위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악용해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지적이었다. PC 제조업체들에게 윈도를 기본 탑재하도록 하기 위해 시장지배적인 지위를 남용했다는 비판도 강하게 제기됐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인터넷 브라우저로 유명한 넷스케이프를 공격했다가 미국 규제 당국으로부터 분할 명령을 받은 것이다. 넷스케이프의 급격한 성장세에 부담을 느낀 빌 게이츠는 '윈도 95'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끼워팔기 하고 PC 제조업체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넷스케이프를 공략했다. 이 일은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는 1997년 마이크로소프트의 반독점 행위에 대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연방정부 및 20개 주가 함께 가세해서 마이크로소프트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빌 게이츠는 백악관 정보화 회의에 참석하는 등 정치인들과 친분 관계를 다지면서 미국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 재판에 임했지만 결국 패소했다. 자신은 죄가 없다며 반독점 규제의지가 강했던 클린턴 정부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최대 원인으로 꼽힌다.

때맞춰 친기업 성향을 지닌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기업이 쪼개질 수도 있었던 위기였다. 그러나 빌 게이츠는 법무부를 비롯해 소송에 참여한 20개 주 모두와 법정 밖에서 화해하면서 해당 소송 자체를 무효화시켰다.

'창조적 자본주의자'로서의 인생

반독점 소송에서는 간신히 이겼지만 여전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했던 빌 게이츠는 25년간 지켜오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스티브 발머에게 넘겨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대신 빌 게이츠는 최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는 생소한 직책을 맡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일인자였던 때의 생각을 버리지 않던 빌 게이츠는 인사 문제, 윈도의 미래전략 등 마이크로소프트 경영의 모든 부분에서 스티브 발머와 부딪쳤다.

계속된 갈등 끝에 결국 스티브 발머에게 전략 결정권을 넘기고 이인자 역할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빌 게이츠는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에서의 은퇴 이후 빌 게이츠의 주요 화두로 자리 잡은 '창조적 자본주의'였다.

'창조적 자본주의'란 기업활동을 통해 돈을 버는 동시에 자선활동도 하는 결합된 형태의 자본주의를 뜻하는 개념이다. 이는 2007년 7월 하버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빌 게이츠가 거론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후 빌 게이츠는 세계경제포럼 연설을 비롯해 강연회, 축사 등 발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해 강조해오고 있다.

과거 '80%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위해, 나머지 20%는 자선사업에' 시간 및 비용을 투여하던 빌 게이츠의 삶도 큰 전환을 맞았다.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다투던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가까이 지내며 빈곤문제 및 자선사업에 부쩍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딴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도 이즈음 만들었다.

빌 게이츠의 변신은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을 토대로 이뤄졌다.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출장차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슬럼가 소웨토 지역을 방문했던 빌 게이츠는 자본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빈곤문제와 자선사업 전문가들의 토론하고 수많은 관련서적을 탐독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갔다.

아내인 멀린다 게이츠도 빌 게이츠가 '창조적 자본주의자'로 변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멀린다 게이츠는 남편의 재산을 좀 더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빌 게이츠를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만으로 58세의 빌 게이츠는 아직 젊다. 그의 인생 3막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2박 3일의 짧은 방한 동안 수많은 화두를 던지고 간 빌 게이츠. 세계 최고의 부자에서 세계 최고의 자선사업가로 변신한 그의 향후 행보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빌 게이츠 최대 라이벌? 스티브 잡스!



대학 중퇴후 창업 등 공통점… IT 분야에서 30년간 치열한 경쟁

빌 게이츠의 라이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를 첫 손가락에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IT업계의 거인으로 불리는 두 사람은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미국 서부 해안 도시 출신인 점, 대학을 도중에 그만두고 회사를 창업한 점 등이다.

두 사람은 동업자로 첫 관계를 맺었다. 스티브 잡스가 개발한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에 빌 게이츠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빌 게이츠가 윈도를 만들어낸 이후 스티브 잡스의 매킨토시는 이른바 '주류' 자리에서 밀려났고 이후 두 사람은 치열한 경쟁자가 된다.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이지만 성향만큼은 상당히 다르다. 스티브 잡스가 천재적 발상과 아이디어, 혁신에 대한 열정 등에 비교우위가 있다면 빌 게이츠는 마케팅과 상용화에서 강점을 지닌다. 스티브 잡스가 자기만의 세계관과 영감을 고집했다면 빌 게이츠는 사내외에서 제휴와 협력을 통한 시너지를 추구한 것도 다른 점이다.

서로를 기피했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종종 공개적으로 설전을 벌이며 대립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가 1985년 "(스티브 잡스의 고집 때문에) 애플은 다른 회사와 협력이 어렵다"고 꼬집으면 스티브 잡스는 "윈도는 3류 상품에 불과하다"고 반격하는 식이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PC 경쟁에서 빌 게이츠가 완승을 거뒀다면 2000년 중후반부터는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세워 '모바일 생태계 구축'에 성공한 스티브 잡스가 다소 우세했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며 두 사람의 30년 경쟁은 막을 내렸다. 단 한 명뿐인 라이벌을 떠나보내며 빌 게이츠는 "그와 함께했던 세월은 미치도록 훌륭하게 명예스러운 일이었다"며 "동료이자 경쟁자 그리고 친구로 삶의 절반 이상을 함께 보냈다"고 애도한 바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