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 뒤흔든 공안사건1974년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중 8명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 받아 이후 김영삼·이명박 정권서도 계속

이석기 의원.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아침, 전 국민의 귀를 의심케 하는 뉴스가 들려왔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관계자 10명에 대해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의 압수수색과 긴급체포가 이뤄졌다는 소식이었다. 현직 국회의원에 대한 압수수색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형법상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33년 만에 불거진 '내란음모사태'였고 압수수색 이후 이 의원에 대한 국회의 체포동의안 가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지만 이번 사태의 원인 및 배후에 대한 세간의 의구심도 만만찮다. 국정원과 박근혜정부가 촛불집회 등 위기 상황에 직면해 반전 카드로 이석기 의원 사건을 꺼내든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어서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역대 정부에서는 정국을 뒤흔든 대형 공안사건이 끊이질 않았다. 그중엔 정부와 공안당국이 불리한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공안사건을 조작ㆍ과대포장한 경우도 많았다. 이에 <주간한국>은 역대 정부에서 일어난 공안사건을 되짚어 이석기 의원 사태의 심층을 들여다 봤다.

사건조작해 정적 살해한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정부 시기였던 1940~1950년대 대표적인 공안사건으로는 '국회프락치사건'을 꼽을 수 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6월, 이른바 '남로당프락치(공작원)'로 제헌국회에 침투, 첩보공작을 한 혐의로 김약수 등 13명의 의원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지난 2008연 1월 16일 ‘민족일보 사건’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에서 재심을 청구한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맨 왼쪽)씨와 지인들이 선고 공판이 끝난후 법정에서 나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는‘민족일보 사건’으로 체포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던 조용수 사장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조씨와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이 선고됐던 양모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이승만정부는 이들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 정국을 교란하려 했다는 혐의로 김 부의장 등 13명을 검거했고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최고 10년부터 최하 3년까지의 징역을 선고했다. 관련 피고인들이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했으나 2심 계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있던 관련 의원들은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에 의해 모두 풀려나 사라졌다.

미묘한 점은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실형을 받은 의원 대부분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출신이거나 이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을 뒤쫓았던 공안당국 일원들은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파 혐의를 받았으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는 무한한 총애를 받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국회프락치사건이 반민특위를 없애기 위해 이 전 대통령이 꾸민 일이 아니냐는 의혹도 수차례 제기된 바 있다.

이번 내란음모사태에 연루된 통합진보당과 동일한 이름을 지닌 '진보당사건'도 이승만 정부가 일으킨 대표적인 조작 공안사건으로 꼽힌다.

1956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 당수는 4년 전보다 3배나 늘어난 216만표를 얻어 이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체제에 큰 위협이 됐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월 진보당사건을 발표, 간부들을 구속하고 2월에는 재판도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정당등록마저 취소했다. 당시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진보당은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국제연합 감시하의 남북한총선거를 주장했고 ▦북한 간첩들과 접선해 공작금을 받았으며 ▦공산당 동조자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켜 대한민국을 음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 대부분의 사실이 조작됐음이 밝혀졌다. 1958년 7월 선고공판에서 윤길중 간사장, 김기철 조직부장 등 간부 대부분이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2월 대법원 판결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유독 조 당수만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후 조 당수는 변호인단을 통해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으며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진보당 사건으로 평화통일론 등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동결됐고 진보세력의 활동도 크게 위축됐다.

부여무장간첩사건
진보당사건 49년 만인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는 해당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권에 의한 비인도적이고 반인권적 인권 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결론짓고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이어 2011년 1월 16일 대법원은 조봉암의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부족한 정통성 채우려 이용

1960~1970년대를 꽉 채운 박정희정부 시기는 역대 어느 때보다 공안사건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전력을 호도하고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데 따른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공안사건을 이용한 것이다.

우선 '민족일보사건'을 들 수 있다. 이는 북한을 고무ㆍ동조했다는 혐의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시킨 사건으로 한국 언론사상 발행인이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유일한 필화사건이었다. 1961년 2월 민족일보를 창간, 진보적 성향의 기사를 집중 보도했던 조 사장은 민족일보의 창간 자금을 조총련에서 받았다는 혐의로 그해 10월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31세의 나이로 사형됐다.

조 사장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정부가 인정하기까지는 무려 45년이 걸렸다. 과거사위원회는 2006년 11월 "민족일보사건은 5.16군사쿠데타 주도세력이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반공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 보여주고 대내적으로는 정권 장악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할 필요성 때문에 민족일보의 사장 조용수를 희생시킨 비인도적ㆍ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조 사장 유족들은 이를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 2008년 1월 마침내 무죄를 선고 받았다.

민청학련사건
1967년 일어난 '동백림 사건'도 대표적인 공안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ㆍ이응로, 학계의 황성모ㆍ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당시 동독 수도인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利敵)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사법부는 69년 3월까지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해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여 조사한 203명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했고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러한 재판 결과는 동백림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ㆍ과장했다고 밝혔다.

'1ㆍ2차 인혁당사건'과 '남민전'은 박정희정부가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안사건을 조작한 사례로 꼽힌다.

'1차 인혁당사건'은 1964년 8월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
1차 인혁당사건이 있은 지 10년이 흐른 74년 4월, ''으로 더 잘 알려진 소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 터졌다.

'2차 인혁당사건'으로도 불리는 은 유신반대시위가 확산되던 1974년 중앙정보부가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수사하면서 배후ㆍ조종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지목한 사건이다.

당시 구속된 민청학련 관계자 중 이철,김지하씨를 비롯해 대부분은 1975년 2월 감형 또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지만 도예종씨 등 8명은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ㆍ음모 등의 혐의로 그해 4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됐으며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9월 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고 정의를 내렸고, 유족들은 해당 이를 근거로 재심을 청구, 지루한 기다림 끝에 2007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남민전사건'도 유신 말기인 1979년 발생한 대표적 공안사건이다. 당시 공안기관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약칭)을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으로 규정짓고 이를 결성한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에게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을 적용했다. 체포된 이재문은 1981년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이듬해 사형이 집행됐으며 다른 검거자들은 무기징역과 장기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2011년 8월 25일 서울 중앙지검 이진한 공안1부부장검사가 서초동 서울지검에서 북한 지령 간첩단 ‘왕재산’ 적발과 관련해 브리핑을 하며 북한이 만든 남한 내 지하조직도를 설명하고 있다. 주간한국 자료사진
하지만 2006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남민전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정권안정 위해 공안사건 조작

전두환정부 시기로 문을 연 1980년대 가장 주목할 만한 공안사건은 ''이었다. 이는 정권을 잡은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킨 주모자로 지목하고 재야인사 20여 명과 함께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신군부는 1980년 5.17일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 전 대통령과 고 문익환 목사, 고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씨 등을 내란음모나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후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 등을 민중봉기와 정부 전복을 획책한 사건의 주모자로 발표해 육군본부 검찰부에 송치했고 재판결과 김 전 대통령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여론에 밀린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을 무기징역으로,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했다. 김 전 대통령은 2년 7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나야 했다.

1995년 제정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관련자들의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졌고 2001년과 2003년 무죄판결과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이라는 이유로 재심을 미뤄오다 2003년 10월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 2004년 2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의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태는 이후 33년 만의 일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1981년 9월 있었던 '부림사건'도 전두환정부가 공안사건을 조작한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부림사건은 부산지역 학생, 교사, 회사원 및 재야인사 22명이 정부전복집단으로 조작ㆍ매도돼 구속된 사건이다.

부산 지역의 양서협동조합을 통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은 1981년 9월 영장 없이 체포된 뒤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하며 갖은 고문을 당했다. 결국 검찰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 계엄법, 집시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고 재판정은 5~7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당시 부산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은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것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2009년 8월 재심 공판에서 법원이 일부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고 부림사건 관계자들은 28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최근까지도 반복되는 조작

1990년대 들어 최초로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지만 공안사건은 그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1995년 있었던 ''이었다.

1995년 10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이하 안기부)은 충남 부여에서 총격전 끝에 무장간첩 김동식씨를 체포했다. 김씨에 대해 조사하던 안기부는 이인영 전대협동우회 회장 등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간부 출신들이 김씨와 접촉한 사실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안기부는 전대협 전 간부 3명을 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혐의로 구속, 접촉경위 등을 조사했고 점차 사건을 확산시켜나갔다.

재판 결과 당사자들 모두 무죄가 입증됐지만 문제는 이 사건을 통해 정국이 공안정국으로 급선회했다는 점이다. 이 벌어진 당시 김영삼 정부는 여러 방향에서의 압박에 몰려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겐 전직대통령 전두환, 노태우씨의 사법처리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민생안정에 위기감이 돌고 있었다.

안기부 또한 개혁을 강요받는 처지였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기부는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일련의 수사권을 폐지당했고 야당에서는 아예 안기부의 손발을 자를 법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은 김영삼 정부에겐 한숨 돌릴 시간을, 안기부에겐 존재 이유를 만들어줬다는 평이다.

노무현ㆍ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일심회사건'과 '왕재산사건'이 대표적인 공안사검으로 꼽힌다. 일심회사건은 2006년 10월 국정원이 386출신 정계 인사들을 엮은 간첩사건이다. 당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장민호씨를 비롯해 최기영 민노당 전 사무부총장과 이정훈 전 민노당 중앙위원 등이 해당 사건으로 간첩 혐의를 받아 3~년의 징역형이 선고됐고 장민호씨는 아직 복역중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일심회 조직의 실체를 없는 것으로 보고 이적단체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려 국정원은 부실수사를 했다는 비판에 직면해야만 했다.

총책인 김모씨가 고 김일성 주석에게 지하당을 건립하라는 지령을 받고 간첩단을 구축했다는 혐의를 받은 왕재산사건은 관련자에 대해 간첩 행위 혐의는 유죄판결이 내려졌지만, 왕재산이라는 단체 결성 혐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김씨를 비롯한 5명은 북의 노동당 225국 지령을 받아 반국가단체인 이른바 '왕재산'이란 지하혁명조직을 결성해 국내 정치동향과 군사정보 등을 보고하는 등의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기소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왕재산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부족으로 무죄판결이 내려지며 국정원의 체면이 구겨졌다. 이 사건으로 이명박정부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투표 패배로 수세에 몰린 정국 분위기 반전을 꾀하려던 것이 아니냐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번에 터진 '내란음모사태'를 두고 일각에서 국정원과 박근혜정부의 위기에 따른 조작설을 제기하고 있지만 여타 조작 공안사건과 사뭇 다르게 진행되는 듯하다. 이는 관련자들의 전력 때문으로 해석된다.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경기동부연합 인사들은 과거 '민혁당사건'과 연루된 바 있다.

민혁당사건은 국정원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결성된 민족민주혁명당(이하 민혁당)을 1999년 적발, 관련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국정원은 1998년 전남 여수 해안에서 격침된 북한 잠수함에서 확보한 전화번호 수첩 등을 단서로 남파간첩과 민혁당의 연결고리를 캤다. 민혁당사건으로 1990년대 학원가 주체사상의 교본이었던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씨를 비롯해 하영옥씨, 이 의원 등이 구속됐다. 이후 재판에서 김영환씨는 징역 10년, 하영옥씨는 징역 8년, 이석기 의원은 2년 6월을 선고받는 등 중형이 선고됐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