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삼구-박찬구 '형제갈등' 재발발

금호가의 해묵은 형제갈등이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운전기사가 보안용역직원을 사주, 형인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비서실 자료를 빼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각종 소송전과 경영권 분쟁, 이사회에서의 대립 등 두 사람 사이에 이어져 오던 진흙탕 싸움이 이번 사건으로 재연될 조짐을 보이며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최근 박찬구 회장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 '금호가 형제 갈등'이 새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던 터라 이번 사태가 가져올 파장은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일정 빼돌려 언론에 흘렸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보안용역직원에게 금품을 건네고 박삼구 회장의 일정을 빼돌리게 한 혐의(배임증재)로 박찬구 회장의 운전기사인 금호석유화학 부장 김모씨를 종로경찰서에 고소했다고 3일 밝혔다. 또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김씨의 부탁을 받고 박삼구 회장 비서실에 들어가 자료를 유출한 혐의(방실침입 및 배임수재)로 보안용역직원 오모씨도 함께 고발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제출한 고소장에 따르면 오씨는 김씨로부터 수십 차례 향응을 제공받고 2011년 11월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80여 차례에 걸쳐 박삼구 회장 비서실에서 자료를 사진으로 찍어 유포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고소장에서 ▲얼마나 많은 문건을 빼돌렸는지 ▲범행을 사주한 배후는 누구인지 ▲이 과정에서 금품수수 등 금전거래가 있었는지를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는 "박삼구 회장 비서실 자료가 외부에 유출된 정황을 확인, 자체조사한 결과 보안용역직원인 오씨가 김씨의 사주를 받아 자료를 빼냈고 이 정보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을 공격하는데 활용됐다고 판단, 경찰에 고소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은 오씨가 비서실에 잠입, 박삼구 회장 비서가 관리하는 자료를 무단으로 사진 촬영하는 모습을 CCTV로 적발했다고도 덧붙였다.

경찰 수사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박찬구 회장의 도덕성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박삼구 회장이 외유성 출장을 다녀왔다는 등의 기사가 나온 것이 박찬구 회장이 언론에 악의적으로 흘린 정보 때문이라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날 수 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서로의 관계가 극단적인 악화일로를 걷기까지 두 사람은 어떤 행보를 밟아왔던 것일까.

그룹 전체 이끌어 vs 석유화학 분야 집중

금호가 '형제의 난'의 주인공인 박삼구, 박찬구 회장은 고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3, 4남이다. 박인천 창업주가 작고한 이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영권은 고 박성용 명예회장과 고 박정구 전 회장을 거쳐 박삼구 회장에게 넘어왔다.

1945년 광주에서 태어난 박삼구 회장은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67년 삼양타이어공업(현 금호타이어)에 입사 사회생활의 첫걸음을 뗐다. 이후 계열사를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은 1979년 금호실업 대표이사 부사장과 1990년 ㈜금호 대표이사 사장을 연달아 맡으며 경영능력을 검증받았다.

박삼구 회장의 경영수완이 빛을 발한 것은 1991년 그룹의 새로운 사업인 아시아나항공의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하면서부터다. 1988년 출범한 이후 대규모 시설투자로 어려움이 불가피했던 초기부터 아시아나항공을 맡아 정상궤도로 올려놓은 박삼구 회장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뜬 박정구 회장에 이어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이끌게 됐다.

회사 밖에서의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박삼구 회장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프로골프협회 회장을 맡아 한국골프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2003년부터 지금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2005년부터는 한중우호협회 회장을 맡으며 양국의 교류에도 힘써왔다.

일찍부터 그룹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박삼구 회장과는 달리 박찬구 회장은 입사 이후 주로 석유화학 분야에 집중해 왔다. 물론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다른 그룹의 구조조정본부 격인 비전경영실 사장을 겸임하며 회사의 안방살림을 꼼꼼히 챙기긴 했지만 당시에도 박찬구 회장의 눈은 그룹의 석유화학 분야에 고정돼 있었다는 평이다.

1948년에 태어나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찬구 회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오와대학교에서 통계학을 전공했다. 1978년 금호실업 이사로 경영수업을 시작한 박찬구 사장은 초기에 금호건설에 잠깐 발을 담근 것 이외에는 금호몬산토(2001년 금호석유화학에 합병), 금호미쓰이화학, 금호석유화학 등을 거치며 석유화학 분야의 산증인으로 자리잡았다.

1984년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임한 후 30년의 세월을 석유화학 분야를 맡아 합성고무분야 세계1위의 위업을 세운 박찬구 회장은 지난 2009년 한국 석유화학산업 발전과 금호아시아나그룹 화학부문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모교인 아이오와대학교에서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숫자에 밝은 재무통 vs 돌직구 경영

형제간이지만 박삼구, 박찬구 회장의 경영스타일은 사뭇 다르다. 박삼구 회장이 꼼꼼한 재무통이라면 박찬구 회장은 우직한 '돌직구 경영'을 구사한다.

박삼구 회장은 형제들 중에서도 박인천 창업주를 가장 많이 닮은 아들로 꼽힌다. 수리에 밝고 '정도경영'을 표방하는 점이 부친과 판박이라는 것이다. 우선 박삼구 회장은 그룹 총수이면서도 재무ㆍ관리ㆍ세무회계 등에 정통해 계열사들의 세세한 재무상태까지도 훤히 꿰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분기별 영업실적, 매출, 순이익, 영업이익률 등 모든 경영지표를 훤하게 꿰차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실제로 박삼구 회장 앞에서 보고하는 임직원의 경우 구체적인 수치를 묻는 말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해 호통을 듣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전해진다.

수치에 밝은 박삼구 회장이지만 이윤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기업의 존재 이유를 이윤추구가 아닌 고용창출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 박삼구 회장의 지론이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박삼구 회장이 안식휴직제를 고안, 직원들을 퇴직시키는 대신 무급휴직시킨 후 사태가 진정되자 복직시켰다는 얘기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박찬구 회장은 겉으로 풍기는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업무 추진에 있어서 우직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문제가 발생하면 정면돌파를 하고 한번 시작한 사업은 끝까지 밀고 나가 육성시키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박찬구 회장의 우직함에 대해 금호석유화학 내부에서는 '돌직구 경영'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을 정도다.

이러한 박찬구 회장의 돌직구 경영은 세계 최대 고무화학약품업체인 플렉시스와 6년간 소송 끝에 승소한 것에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004년 플렉시스는 금호석유화학의 고무 산화방지제가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금호석유화학의 미국 시장진입을 견제하기 위한 플렉시스의 전략에 박찬구 회장은 "시간ㆍ비용과 상관없이 끝까지 가라"고 지시, 2010년 해당 특허권 분쟁에서 모두 승소했다.

전자소재사업을 10년 이상 밀어붙이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합성고무나 합성수지 등 금호석유화학의 주력 사업영역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여전히 전자소재사업을 '신성장동력'이라 칭하며 우직하게 밀어주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말에는 탄소나노튜브 사업이 4년 만에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가는 등 결실도 보고 있다.

몇 년째 계속된 진흙탕 싸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박삼구, 박찬구 회장의 사이가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호가는 한때 재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잡음 없는 형제경영으로 세간의 칭송을 받은 바 있다. 장남부터 3남까지 그룹의 경영권이 자연스레 이어져왔고 형제들이 가구별로 10.1%씩의 지분을 동일하게 보유, 가족회의를 통해 주요 사안을 결정하는 등 보기 드문 우애를 자랑했던 것이다.

이는 박인천 창업주가 생전에 세운 그룹경영원칙을 2세들이 충실히 따른 데서 비롯됐다. 박 창업주는 자녀들의 지분 분배와 관련해 ▦여러 사람이 관여하면 분란이 생기기 쉬우므로 남자들에게만 상속하고 ▦4자(5남 가운데 박종구 한국폴리텍 이사장을 제외한 박성용,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회장)합의 경영 형태로 형제간 합의아래 회장을 선임하고 ▦주요 사안에 대해서도 4자 합의가 최우선이지만 합의가 안되면 다수결 원칙에 따르고 ▦그래도 결정나지 않으면 가장 손윗사람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실제로 부친의 뒤를 이어 1984년 그룹 총수에 취임한 박성용 명예회장은 65세가 되던 1996년 그룹 창사 50주년을 맞아 박정구 전 회장에게 대권을 물려줬다. 박정구 전 회장이 65세가 되던 2002년 폐암으로 세상을 뜬 이후 박삼구 회장이 회장직을 이어받았고 자연스레 금호가의 65세 전통이 생기는 듯했다. 이러한 전통대로라면 박삼구 회장은 박찬구 회장에게 2009년 경영권을 물려줬어야 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 2000년 중반부터 조짐이 보인 박삼구, 박찬구 회장의 갈등은 2009년 마침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이 2006년과 2008년 각각 대우건설, 대한통운을 인수하면서부터다. 박찬구 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삼구 회장이 주도해 두 회사를 인수한 직후 금융위기로 경영난을 겪으며 대한통운을 되팔아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며 형제간 갈등이 촉발된 것이다. 박찬구 회장이 아들 박준경 금호석유화학 상무와 함께 지분을 사들이면서 보유지분을 18.47%까지 높였고 박삼구 회장도 이에 대응해 지분 매집 경쟁을 벌이게 됐다

두 사람의 지분 매집으로 형제들이 똑같은 지분을 나눠 갖던 전통이 깨지면서 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형제의 난'이 일어나게 됐다. 결국 박삼구 회장은 2009년 이사회를 열어 박찬구 회장을 해임하고 본인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에 이른다. 이듬해 채권단의 중재로 박찬구 회장은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 회장으로, 박삼구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으로 각각 경영에 복귀하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금호가 '형제의 난'은 2011년 또다시 발발했다. 금호석유화학이 공정거래위원회에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금호그룹에서 제외해 달라고 신청했고 박찬구 회장은 비자금 조성, 내부자 거래 혐의 등으로 검찰에 조사를 받던 중 박삼구 회장을 사기 및 위증 혐의로 고발했다. 앙금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두 사람과 이들이 이끄는 그룹들은 이후 '금호' 상표권을 둘러싼 소송전, 아시아나항공 이사회에서의 대립 등 진흙탕 싸움을 계속해 왔다.

형제갈등 파장 확산될까

지난달까지만 해도 박삼구, 박찬구 회장 간의 갈등은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두 사람의 화해를 어렵게 만들어 온 박찬구 회장의 재판 결과가 무죄로 나왔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박찬구 회장이 대우건설 매각과 관련,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내부자 거래, 납품가 부풀리기를 통한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를 벗은 이상, 박삼구 회장과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그러나 박찬구 회장의 운전기사가 박삼구 회장 비서실 자료를 빼낸 이번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사건은 3월에 있을 아시아나항공의 주주총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2.61%의 지분을 보유, 아시아나항공의 2대주주로 있는 금호석유화학이 상호출자에 따른 의결권 제한을 근거해 최대주주(30.08%)인 금호산업의 의결권 제한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의 유권해석에 따라 금호산업 기업어음 790억원어치를 주식으로 전환, 13.08%의 지분을 갖게 됐다. 상호출자한 지분율이 10%를 초과하는 양사는 상법 제269조 3항에 따라 의결권이 제한된다.

이 경우 금호석유화학은 의결권이 제한된 금호산업 대신 아시아나항공의 최대주주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박삼구, 박찬구 회장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 이상 금호석유화학이 김수천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 사장의 선임 등 주요 안건에 대해 재를 뿌리며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금호석유화학은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선임과 관련해 "부적절한 인사선임"이라고 반대한 바 있다. 다시금 깊어진 금호가의 형제 간 갈등이 향후 어떤 양상으로 드러날지 주목되는 이유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