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경제·체육 등 유리천장 깨트린 '여성1호'들

여성가족부 주관으로 지난달 2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유리천장을 깬 '여성 1호' 간담회에서 참석인사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부터 성시연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이경숙 GS건설 상무, 김은영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이인선 경상북도 정무부지사, 조희진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 김영란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조윤선 장관, 권선주 기업은행장,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회장, 서영경 한국은행 부총재보, 박경순 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 최은주 포스코상무, 양향자 삼성전자 상무.
"여성들이여, 성공하려면 코뿔소만큼 두꺼운 피부를 가져야 한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67) 전 미국 국무장관이 뉴욕대학 학생들에게 알려준 '성공하는 팁'이다. 뽀얗고 깨끗한 피부를 갖기 위해 피부관리에 투자하는 여성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얘기다. '유리천장 깨기' 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는 힐러리 전 장관은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는 얘기"라고 안심시키면서 "비판을 기꺼이 듣고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리천장이 무너지고 있다. 걸출한 여성지도자들이 세계정치를 주도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선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다. 굳건한 '유리벽'이 깨지면서 여성은 남성의 보조가 아니라 전문적인 영역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여성1호들이 속속 나오면서 후배들을 위한 고민의 장도 마련됐다. 얼마 전 조윤선(48) 여성가족부 장관이 '여성1호'들과 만남을 갖은 게 대표적이다. 한국사회를 주도하는 여성1호들을 살펴보고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조언을 들어보았다.

관계에 분 여풍은 '신호탄'

안전행정부의 '연도별 여성공무원 인원 및 비율'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공무원 비율은 전체 공무원의 절반을 넘어섰다. 보수적인 공무원 조직에서도 여성 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고위공무원단(실ㆍ국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해 말 유리천장이 깨지는 소리가 잇따라 울려 관심을 모았다.

지난해 12월, 조희진(52ㆍ사법연수원 19기)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검사는 '여성1호' 검사장이 됐다. 10년 전, 김영란(58ㆍ사법연수원 11기)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된 후 한동안 법조계에선 여풍이 잠잠했다. 사법연수원의 절반은 여성이 차지했지만, 고위직에 이름을 올린 여성은 찾기 어려웠다.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중 조 검사가 물꼬를 텄다.

같은 시기, 이금형(56) 부산지청장은 경찰 창설 68년 만에 첫 여성 치안정감으로 올라섰다. 치안정감은 경찰총장인 치안총감 다음 직급으로 경찰청 차장, 서울지청장, 경기지청장, 부산지청장, 경찰대학장 총 5명이다. 이 지청장은 1977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해 여성 첫 치안정감이라는 기록을 세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보수적이라고 소문난 경북에서도 여풍이 불고 있다. 이인선(55) 경상북도 정무부지사는 2년 전 최초의 여성 정무부지사가 됐다. 계명대 자연과학대 교수로 지역 과학진흥을 위해 노력한 여성과학자다. 이 부지사는 호탕하고 적극적인 '여걸'로 동료 공무원들의 신망도 두텁다.

공공기관에서도 여풍이 불고 있다. 최연혜(58) 코레일 사장은 첫 여성 공기업 수장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다. 대학시절 독일어를 전공하고 독일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는 동안 독일 철도 산업을 체험해 이 분야 전문가다.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파업사태를 맞아 노조와의 대립이 극으로 치달아 리더십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코레일에는 최 사장에 앞서 주목 받은 여성리더가 또 있다. 김양숙(46) 코레일 서울역장이 그 주인공이다. 김 서울역장은 순천여고를 졸업한 뒤 재수 준비 도중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철도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박경순(59) 국민건강보험공단 징수상임이사도 눈에 띄는 인사다. 박 이사는 1979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사원으로 입사한 후 대구지역본부장, 부산지역본부장을 역임했다.

경제계 여풍은 '순풍'

일반 대기업이나 금융계로 눈을 돌리면 주목 받는 여성리더가 더 있다. 최근 들어 외부에서 영입한 인사가 아닌 내부인사가 각고의 노력으로 유리천장을 깬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최은주(47) 포스코A&C 상무는 남성 중심적인 철강업에 '여성 공채 1기'로 입사해 여성 최초의 임원이 되는 역사를 썼다. 남성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최 상무를 두고 억센 슈퍼우먼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본인은 특유의 친화력과 적극성을 비결로 꼽는다.

양향자(47) 상무도 28년간 삼성전자에 몸담은 '전통 삼성맨'이다. 양 상무는 광주여상을 졸업하고 삼성전자 메모리 설계실에서 연구원 보조로 일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반도체 관련 석사 학위를 따는 등 노력한 성실파다. D램과 메모리 설계팀에서 제품개발시간을 단축하는 등 성과를 냈으며,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여성리더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 이경숙(47) GS건설 상무, 김정미(44) 제일모직 상무, 송연순(53) 이비스 앰버서더 인사동 총지배인, 한현미(54) 아시아나항공 전무 등도 주목 받는 여성리더다.

금융권에서도 내부인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항상 '최초'수식어를 독점했던 권선주(59) IBK기업은행장이 한국 금융 역사 115년 만에 첫 여성 은행장에 올랐다. 권 행장의 승진을 두고 금융권에서는 '금녀의 벽을 허물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아니다 다를까. 권 행장 승진 후 금융권의 여성임원 발탁 바람이 이어졌다.

서영경(51) 한국은행 부총재보도 한국은행 창립 이래 최초의 여성 임원이다. 1988년 한국은행에 입사한 후 내부에서 실력을 쌓아왔다. 국제국 팀장, 통화정책국 금융시장부장 등을 지내며 통화·외환 부문에 폭넓은 실무 경험이 있다. 부드러우면서 소신 있고 신중한 성품으로 조직 내 신망이 두텁다.

신순철(54) 신한은행 부행장보는 1979년 조흥은행에 입사하면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기업금융 전문가다. 신 부행장보는 적극적인 성격과 강한 결단력, 추진력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손병옥(62) 푸르덴셜생명 사장은 여성들이 좀처럼 통과하기 힘든 재취업 관문을 두 번이나 뚫으면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특히 보험업계로 뛰어든 건 마흔 문턱을 넘어서고 나서다. 그 전까진 은행업계에서 인사, 회계, 감사 분야를 맡았는데, 보험업계의 독보적인 여성리더로 주목 받고 있다.

문화체육계도 '약진'

문화체육계는 여성에게 진입장벽이 낮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고위직을 차지하는 건 남성이었다. 문화체육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김해숙(60) 국립국악원장도 첫 여성 수장이다. 서울대 국악과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했다. 예술과 학문, 행정경험을 두루 갖춘 인물로 남녀를 아우르고 국악을 대중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성시연(38)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단장은 우리나라 첫 국공립오케스트라 여성 지휘자다. 유쾌한 성격과 적극적이면서 세심한 리더십이 장점이다. 그 밖에 김은영(45)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이 야구계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관심 받고 있다. 기업인 출신인 김 부회장은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관심을 받고 있다.

'여성1호' 20명… "포기 말고 적극적으로"

여성 인력은 이제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결혼과 출산,육아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여성1호'들도 한 목소리로 경력단절을 우려했다.

권선주 IBK기업은행 은행장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절대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가사, 육아, 자녀교육은 필요할 때마다 주변사람의 도움을 구하라"고 조언했다. 서영경 한국은행 부총재보도 "육아휴직 제도를 활용해 경력단절을 극복했다"면서 "적극적으로 제도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정부가 여성정책을 강요하면서 기업이나 정부가 배려성 인사를 해 오히려 남성들이 손해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1호'가 갖는 상징성 때문에 너도 나도 여성을 고위직급으로 발령을 내다 보니 전문성이 결여된 인사가 이뤄진다는 것. 한 금융계 관계자는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여성 인력자원이 워낙 적어 소수의 여성은 혜택을 받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영란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남성 관리자에게 물어보면 여성 직원은 궂은일은 안 하려고 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는 평을 듣곤 한다"면서 "부당한 지적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보다 적극적이고 전투적으로 일을 찾아 나서고 책임감을 갖고 업무를 수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