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정치적 사안들로 적잖은 파장, 여론 떠보기 전략 시각도

盧 사적발언 '흘리기', 노림수 뭔가?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로 적잖은 파장, 여론 떠보기 전략 시각도

‘식사(식탁) 정치’와 ‘청와대 소식통’. 연초부터 정치권에서 회자되고 있는 신조어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과 열린우리당 주요 인사들이 비공식적인 청와대 오찬ㆍ만찬 모임에 참석한 뒤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중계 방송하듯 언론에 흘린 것을 빗대 하는 말이다. 특히 이렇게 공개된 노 대통령의 ‘사적 발언’은 하나같이 4ㆍ15 총선과 관련된 민감한 내용들이어서 야당측을 자극하고 곧바로 정치 쟁점화 하는 등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노무현 대통령이 18일 저녁 열린 우리당 정동영 당의장과 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 만찬에 앞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이종철 기자

노 대통령의 계산된 총선전략?

노 대통령은 지난 연말부터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핵심 측근들을 청와대로 잇따라 초청해 오찬 또는 만찬을 했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김원웅 의원 등 일부 참석자는 부부동반으로 초청을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18일 당시 김원기 열린우리당 창당주비위원장과의 독대를 시작으로 1월18일 정동영 의장 등 열린우리당 새 지도부와의 만찬회동까지 청와대에서 20여 차례의 비공식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야당이 문제 삼는 것은 청와대 모임의 횟수가 아니라 4ㆍ15 총선 정국과 관련된 노 대통령의 의미심장한 발언 내용들이다. 특히 노 대통령의 발언이 청와대 수석이나 대변인 등 공식라인을 거치지 않은 채, 참석자들의 입을 통해 간접화법 식으로 언론에 속속 공개돼 그 내용은 물론 방식마저도 곱지 않은 눈총을 받고 있다.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사적으로 나눈 대화는 철저하게 비밀에 붙인다는 것이 역대 정권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대통령과의 청와대 독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당사자는 한동안 독대 명단에서 빠졌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청와대 비공식 모임의 노 대통령 ‘사적 발언’이 야당의 거센 반발을 불러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여과 장치 없이 언론에 계속 줄줄이 공개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총선 승리를 위한 노 대통령의 ‘계산’에 따른 고도의 전술이라는 분석이 제기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법적, 현실적으로 총선에 개입할 통로가 여의치 않다는 판단 아래 비공식 오ㆍ만찬 모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노 대통령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사적 발언’이 면담 인사들의 출신지역에 따라 지역적으로도 안배돼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TK(대구ㆍ경북) 출신의 이강철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을 만나서는 “(지난해 12ㆍ28 개각에서) TK정서를 감안해 개각을 했다”며 영남권에 힘을 실어준 반면, 호남 출신의 염동연 전 대통령후보 정무특보를 만나서는 “요즘 광주만 생각하면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 광주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며 호남 민심에 호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언론에 애드벌룬을 띄워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여론의 추이를 떠보기 위한 전략이라는 시각도 있다. 문제가 커질 경우 ‘사적 발언’이라고 차단막을 치며 불똥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청와대측은 비공식 모임에서의 노 대통령 발언이 언론에 잇따라 공개돼 정치권의 논쟁거리로 비화하는 상황에서도 “사적인 발언 이상 이하도 아니다”며 구체적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문희상 청와대 비서시장까지도 ‘총선 양자구도’ 발언이 노 대통령의 총선개입 문제로 비화하자, “대통령의 숨소리까지 정쟁거리로 삼는 트집정치는 중단돼야 한다. 사적인 비공개 오찬에서의 발언을 갖고 사전 선거운동이니 선거법 위반이니 운운하는 것은 생트집”이라며 야당의 비판을 트집 정치로 맞받아쳤다.

‘청와대 소식통’으로 알려진 인사들도 정작 자신이 언론에 전달한 노 대통령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자 “사실이 왜곡됐다”거나 “사실 무근이다”며 언론에 항의하는 등 소동을 빚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모 신문이 노 대통령 측근의 발언을 인용, 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0일 측근들과의 송년오찬에서 검찰의 측근비리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내가 (인사권자로서 검찰을) 죽이려 杉摸?두 번은 갈아 마실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보도한 내용. 이에 대해 청와대는 해당 언론사를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및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내기로 하는 등 강력 반발했고, 보도의 진원지로 알려진 신상우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노 대통령이 직접 한 발언이 아니라 검찰 수사에 대한 대통령의 심정이 이런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 것을 기자가 곡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청와대 오ㆍ만찬 참석자들이 전한 노 대통령의 주요 발언

- "4ㆍ15총선은 한나라당을 하나의 세력으로 하고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축으로 하는 구도로 가게 될 것이다.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꼴이다." (2003년 12월24일 총선출마를 위해 사퇴한 청와대 비서관ㆍ행정관 9명과의 오찬)

- "내가 어떻게 해서 대통령이 됐는데 호남을 잊을 수 있겠는가. 요즘 광주를 생각하면 억울해서 잠이 안 온다. 내가 호남의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한번 마련해 보라. 광주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12월 말 염동연 전 대통령 후보 정무특보와의 식사 자리)

- "닭서리와 소도둑 중 어떤 게 더 나쁘냐고 말하려고 했으나 너무 심한 것 같아 고심 끝에 '10분의 1'이라는 표현을 섰다." (12월31일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 7명과 오찬)

- "선관위에 대통령이 선거에 개입하지 말라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한 유권해석을 내려달라고 요청할 생각이다." (12월31일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 7명과 오찬)

- "(이번 개각에서) TK 정서를 감안해 인사를 했다." (2004년 1월2일 이강철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과의 회동)

- "총선을 앞두고 개혁당이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것은 잘한 일이다. 대통령도 정치인으로 열린우리당 입당 의사는 확고하다." (1월4일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과 회동)

盧,“식사정치 좋은 것 아니냐”

일부에서는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고의적으로 노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을 당의 인지도 제고 및 총선용으로 활용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아울러 일부 총선 출마자들이 “(나는) 대통령과 식사할 수 있는 위치”임을 암시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는 차원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들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노 대통령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이 언론에 계속 흘러나가 정치적으로 논란을 일으키자 ‘대통령 발언 누설자 면담 금지’ 조치를 강구키로 하는 등 뒤늦게 부산을 떨었다.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은 1월12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여의도 당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앞으로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을 만난 뒤 그 내용을 언론에 흘리는 사람은 면회를 금지시켜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인사에게는 언론에 공개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까지 했는데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흘리는 것은 자질의 문제”라면서 “앞으로는 더 이상 정치인과의 면담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유 수석의 이 같은 다짐은 희망사항에 그칠 것 같다. 노 대통령이 1월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식사정치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미국의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키친 캐비닛(식탁 내각)’을 예로 들며 “식사정치는 좋은 것”이라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다른 당에서 보면 언짢은 이야기가 자꾸 나간 점에 대해서는 결과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전달될 우려가 있다고 해서 사석에서 격려 이야기도 못한다면 너무 어렵지 않느냐”고 항변조로 말했다. 게다가 4ㆍ15 총선에 ‘올인’을 도모하고 있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총선이 다가올수록 비공식 모임을 더욱 자주 갖게 될 여지도 다분하다. ‘청와대 소식통’이 전하는 노 대통령의 ‘사적 발언’이 언제, 또 어떤 강도로 다시 터져 나올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김성호 기자


입력시간 : 2004-01-28 14:29


김성호 기자 sh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