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이미지로 새 지도자상 각인, 탄핵 현실화 땐 '차기' 유력후보야당 의도적 고건 띄우기, 개헌 밀약설 등 시나리오도 흘러나와

고건 대망론, 실체는 뭔가?
안정된 이미지로 새 지도자상 각인, 탄핵 현실화 땐 '차기' 유력후보
야당 의도적 고건 띄우기, 개헌 밀약설 등 시나리오도 흘러나와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뜨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이란 족쇄에 손과 발이 묶이면서 고 대행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치권은 탄핵과 총선이라는 중대 현안을 앞에 놓고 이미 고 대행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청와대와 여야 간에는 수 차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고 대행에 대한 관심은 정치권 밖에서도 치솟고 있다. 남덕우ㆍ서영훈 전 총리 등 평소 고 대행과 가까운 사회 원로들은 수시로 조언과 격려를 보내고 있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탄핵안이 가결된 3월12일부터 ‘고건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고사모)’ ‘고건과 함께 하는 세상’ ‘고건 사랑’ 등 고 대행 팬카페가 잇따라 개설되고 있다.

때문에 정가 일각에서는 ‘고건 시대’가 열렸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탄핵정국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에 ‘행정의 달인’이라는 고 대행이 등장, 노 대통령과는 다른 국정 운영과 안정적인 이미지로 국민에게 새 지도자상을 심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 ‘대행’ 불구 고건시대에 의미

고 대행에게는 비록 ‘시한부’ ‘대행’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지만 ‘고건 시대’라는 상징 이면에는 간과하기 어려운 함의가 내포돼 있다. 먼저 ‘고건 시대’는 고 대행과 노 대통령을 대비시킴으로써 국민이 두 사람의 국정운영을 비교 평가할 수 있는 단초로 작용하고 있다.

고 대행체제 초기, 야당이 ‘고건 띄우기’에 나선 것은 그러한 근거에서다. 민주당 조순형 대표는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한치의 차질도 없이 국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민주당이 앞장설 것”이라면서 고 대행에 힘을 실어줄 것을 천명했다. 다음날에는 한나라당 홍사덕 전 총무가 오전에 열린 당 상임운영회의에서 “고건 권한대행은 안정과 화합의 대명사다. 지난 1년 국정은 야당과 국민의 대결이었다. 앞으로 4년이 그 같은 모습이 안 되도록 결단을 내렸고 고건 체제가 화합과 안정의 대명사였던 이름 값을 하게 될 것이다”고 말해 우회적으로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폄훼했다.

야당이 고 대행에 힘을 실어 준 데는 탄핵정국에서 고 대행이 국민에게 안정감을 심어줄 경우 탄핵에 따른 노 대통령에 대한 ‘동정론’이 줄어들 것이라는 노림수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탄핵에 따른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급상승한 효과도 감쇄시킬 수 있다는 게 야당의 계산이었다.

청와대는 야당의 ‘고건 띄우기’를 정략적 발상이라며 무시했지만 내심 부담스러워 하는듯한 눈치다. 노 대통령의 한 386 측근은 “고건 총리가 탄핵정국을 잘 수습할 것으로 본다”고 말한 뒤 ‘기우(杞憂)’를 전제로 “노 대통령이 복귀한 뒤 강도높은 개혁을 추진할 때 어느 정도 혼란과 갈등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데, 국민이 고 대행체제의 안정감에 맛을 들였다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고 대행의 팬카페에 올라오는 글들은 대부분 고 대행의 안정적인 이미지와 행정력을 치켜세우고 있어 386 참모의 기우가 현실화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터넷 다음 사이트에 ‘주인장’이라는 이름으로 ‘고건 대통령추대모임’ 카페를 개설한 한 네티즌은 “탄핵, 친(親)노, 반(反)노 등으로 어지러운 이 시대에 그래도 고건 총리 같은 분이 계셔서 이 나라가 지탱된다고 느껴 카페를 열게 됐다”고 설명한 뒤 “말없이 일하는 고건 총리를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 해프닝으로 끝난 역모설

‘고건 시대’는 고 대행에게 기회와 위기라는 상반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1월30일, 조순형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ㆍ당직자 10여명이 검찰의 한화갑 전 대표에 대한 (편파)수사를 항의하기 위해 고건 총리를 방문한 뒤 총리실 주변에서는 느닷없이 이상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야당이 개헌, 또는 탄핵으로 노 대통령을 밀어내고 고 대행을 대통령(또는 내각제 총리)으로 옹립한다는 ‘설’이었다. 당시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막상 탄핵이 되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주당의 항의 방문 자리가 고 대행과 민주당 관계자들과의 ‘인연’으로 부드럽게 진행되고, 참석한 일부 인사가 고 총리의 경륜을 노 대통령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 대행을 둘러싼 이 같은 역모설(?)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고 대행이 대선 때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된 것은 탄핵정국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에 따라 고 대행의 입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탄핵안 가결을 전후해 정가에서 제기된 야 3당의 ‘개헌 밀약설’도 마찬가지다. 고건 총리를 권력의 축으로 여긴 시나리오의 하나다.

노 대통령은 이제 헌법재판소의 심판과 4ㆍ15 총선 결과에 따라 대통령직 유지 여부가 결정된다. 노 대통령은 탄핵으로 이미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태고, 3월11일 기자회견에서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상응하는 정치적 결단을 하겠다”고 밝혀 ‘총선=재신임’연계의 뜻을 분명히 했다. 헌재가 국회의 탄핵안을 수용하거나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의외의 결과를 얻는다면, 노 대통령이 하야하는 상황도 가정할 수 있고,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각 정당이 차기 대권 후보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선거가 치러지면 고 대행은 여권의 강력한 후보로 부상할 수 있다. 탄핵정국에서 검증받은 국정운영의 경륜이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 등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사들보다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대행이 3야가 요청한 임시국회 시정연설을 거부하는 등 여권을 의식한 몸 낮추기 행보를 계속하는 것도 이른바 ‘고건 대망론’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해석도 정가 일각에서 제기된다.

- 盧 복귀뒤 개혁추진에 부담

하지만 최근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사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다수를 이루고, 총선 지형도 열린우리당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양상을 보여 ‘고건 대망론’은 그야말로 ‘말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노 대통령이 돌아오면 총리가 교체될 것이라는 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탄핵정국 이후 고 대행과 노 정권 간에 불협화음이 불거지면서 총선 후 고건 총리 교체설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강금실 법무장관의 언행에 대해 고 대행이 질타를 한 것이나. 청와대가 고 대행이 주재하려던 청와대 수석ㆍ보좌관 회의를 무산시킨 것, 고 대행에 사면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주문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에 앞서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 총리로 고건씨를 발탁했다. 그리고 삼고초려끝에 영입했다. 노 대통령의 ‘초심’(初心)이 탄핵정국 이후에도 지속될 지 관심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3-23 20:44


박종진 기자 jjpar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