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동영·김근태 불협화음개각·차기 놓고 갈등 양상, 집권 2기 국정서 파열음 커질 수도
싹트는 불신, 배신의 계절 오나? 노무현·정동영·김근태 불협화음 개각·차기 놓고 갈등 양상, 집권 2기 국정서 파열음 커질 수도
- 정치적 뿌리 다른 태생적 한계 노무현-정동영-김근태 세 사람의 불협화음을 두고 정가에서는 ‘태생적 한계’를 거론하기도 한다. 정치적 뿌리와 성장 과정이 달라 궁극적으로 ‘동행(同行)’하기 어려운 인연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정치 입문부터 다르다. 노 대통령은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YS) 전 대통령 밑에서 정치에 입문한 뒤, 97년 대선을 앞두고 그가 속한 국민통합추진위(통추)가 DJ 쪽으로 선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근태 전 대표는 83년 민청련을 결성한 후 YS와 오랫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87년 대선 때 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 깃발의 선두에 서면서 DJ 사람으로 분류됐다. 정동영 전 의장은 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DJ가 총재로 있던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세 사람은 97년부터 국민회의라는 공간에서 정치적 인연을 쌓아갔지만 노 대통령의 정치적 뿌리는 YS로, 정치 속성상 DJ와 가까운 김 전 대표나 정 전 의장과 구별된다. 또한 김 전 대표가 재야 출신인데 반해, 노 대통령과 정 전 의장은 각각 변호사와 방송인으로 재야 경험이 없는 전문가 그룹이란 점도 다르다. 세 사람은 대선후보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을 계기로 경쟁 관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던 노 대통령과 정동영ㆍ김근태 두 최고위원은 개혁세력의 차기 주자로 부각됐다. 세 사람은 그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2002년 대선, 신당 창당, 최근의 개각 논란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경쟁과 갈등의 단면들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표간에는 재작년 대선 과정에서 적잖은 앙금이 쌓였다. 특히 노 대통령이 2002년 8ㆍ8 재보선에서 참패한 뒤 당내 ‘노무현 흔들기’가 한창일 때 김 전 대표가 보인 태도에 불만이 많다. 노 대통령의 한 386 측근은 “김 전 대표에게 선대위 요직 참여를 거듭 요청했지만 그는 오히려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주장해 충격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표가 노 후보와 재벌의 아들 사이에서 등거리 스탠스를 취한다거나, 보다 정확히는 재벌의 아들쪽에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표측은 “당시로서는 후보단일화 없이 평화개혁 세력의 정권 창출은 불가능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지만 노 대통령측의 의구심을 불식시키진 못했다. 대선 이후 신당 창당과 관련, 노 대통령은 17대 총선에서 여대야소의 ‘전(全)통령’이 되기 위해 개혁세력에 신당 창당을 주문했지만 맏형격인 김 전 대표는 분당형 창당에 반대하다 막판에 합류했다. 당연히 노 대통령측은 김 전대표가 당 대표를 노리고 동교동계와 개혁파의 양측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막판에 할 수 없이 ‘명분’을 따른 게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김 전 대표측도 노 대통령측에 불만이 적지 않다. 대선 과정은 물론 최근 개각 파동에 이르기까지 김 전 대표를 견제 내지 무시했다는 것이다. 지난 1ㆍ11 열린우리당 당 의장 경선에서 노 대통령이 정 전 의장을 밀어 김 전 대표가 불출마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나 (통일부 장관) 입각을 전제로 원내대표 재도전을 포기했는데 ‘보건복지부 장관설’이 흘러나오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노 대통??정동영 전 의장과의 관계는 ‘동지에서 적’으로 변해가는 듯한 양상이다. 정 전 의장은 재작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끝까지 완주, ‘노풍(盧風)’을 견인한 1등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노 대통령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대선 직전인 12월18일 종로 유세에서 “국민경선을 끝까지 지켜주고 내 등을 떠받쳐 주었다”며 정 전 의장을 차기 주자로 치켜세웠다. 대선 후 정 전 의장은 여당내 개혁세력을 대변하는 ‘천(천정배)ㆍ신(신기남)ㆍ정(정동영)’의 리더로 신당 창당을 주도해 노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했다. 노 대통령도 비록 총선을 위한 전략이었지만 1ㆍ11 전대에서 직계그룹에게 정 전 의장 지지를 전달해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이 1ㆍ11 전대와 4ㆍ15 총선을 통해 다져진 입지를 토대로 대권 행보에 속도를 내면서 노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다. 조기에 대권 레이스가 점화될 것을 우려한 노 대통령은 정 전 의장을 입각 대상에 올려 친노세력의 당 장악을 뒷받침했다. 입각을 둘러싼 노 대통령과 정 전 의장의 힘겨루기도 양측의 간극을 넓혀놨다. 정가에서는 정 전 의장이 ‘김혁규 총리-김근태 통일부장관 내정설’에 반발, 당 의장 고수를 내세워 노 대통령을 압박했다는 후문이다. 최근 정 전 의장이 통일부 장관에, 김 전 대표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정리가 된 데는 정 전 의장 특유의 ‘몽니’가 통했다는 후문이다. 정 전 의장과 김 전 대표는 줄곧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표면적인 출발점은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대회다. 세력이 미미했던 정 전 의장은 당초 예상을 깨고 5위로 최연소 최고위원이 돼 6위를 한 김 전 대표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이후 2002년 대선과 신당 창당 과정에서 정 전 의장은 ‘개혁’의 이니셔티브를 놓고 재야의 대부인 김 전 대표와 선명성 경쟁을 벌였다. 1ㆍ11 당 의장 경선과 5ㆍ11 원내대표 선출에서 정 전 의장이 두 차례나 김 전 대표측을 눌러 대권 경쟁에서 앞서 있다는 평이 중론이다.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최근에는 입각을 둘러싸고 정 전 의장측과 김 전 대표측이 감정 대립 양상까지 보여 두 사람이 화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3인3색(三人三色). 돌아온 왕과 차기 왕을 꿈꾸는 세 사람의 얽히고 설킨 인연이 앞으로 노 대통령의 집권 2기 국정과 대권 레이스에서 어떤 파열음을 일으킬 지 주목된다.
입력시간 : 2004-06-0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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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