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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동진, 행진은 계속된다
'新동진정책' 6·5 재보선서 직격탄, 영남특위 등 전략 궤도수정 불가피

99년 2월, 노무현 당시 국민회의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비교적 수월한 종로구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 출마를 선언했다. 측근 인사들조차 ‘바보 같은 선택’이라고 말렸지만 노 의원은 결단을 강행했고, ‘바보 노무현’은 4년 뒤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그때 노 대통령이 ‘쉬운 길’을 택했다면 영광의 길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5월 11일 탄핵의 족쇠를 벗고 국정 2기를 시작한 노 대통령이 또 한차례 ‘바보의 꿈’을 재현하려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김혁규 총리 카드나 영남발전특위, 민주대연합론 등이 그 암시라는 해설이 뒤따른다.

“대통령이 두번의 봄(탄핵 기각, 총선 승리)을 맞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봄’이었다.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었다”.

6ㆍ5 재보선을 앞두고 김혁규 총리 지명 문제로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여야가 논쟁을 벌일 때 노 대통령의 한 측근 인사(영남 출신)가 한 말이다. 그는 “대통령이 탄핵정국에서 벗어났지만 일부 ‘위법성’이 인정됐고, 무엇보다 ‘탄핵받은 대통령’이란 주홍글씨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멍에”라며 “총선에서 탄핵역풍으로 여대야소를 이뤄냈다고 하지만 ‘영남 참패’는 총선 승리를 무색케 할 만한 깊은 상처이자 악재”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이 ‘바보의 꿈’을 꿀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설명도 겯들였다.


- 전국 정당화 기반다지기 무산

노 대통령 입장에서 6ㆍ5 재보선은 4ㆍ15 총선의 연장선 성격을 띠고 있다. 4ㆍ15 총선을 통해 노 대통령이 이루고자 한 것은 열린우리당이 제1당이 되는 것이나 압승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불모지인 영남에 뿌리를 내려 ‘전국정당화’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청와대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총선 직전에 정동영 전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에 대통령이 적잖이 화를 냈다”며 “영남 참패의 단초를 제공한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이 이번 재보선을 앞두고 부산시장ㆍ경남지사 선거에 사활을 걸다시피 ‘영남 올인’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가에서 ‘노무현발(發)’ 신(新)동진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정권 재창출이다. 호남권과 충청 일부가 차기 대선에서도 반 한나라당 노선을 유지할 게 확실한 상황에서 영남권 일부를 무너뜨리기만 하면 열린우리당의 정권재창출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사실이다. 한나라당은 거꾸로 영남권 일부 지지에 안주하는 ‘영민련’(영남의 자민련)으로 전락하고, 민주당은 이미 ‘호민련’(호남의 자민련)으로 떨어진 상황이어서 대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여론분석가이자 중견 정치평론가인 L씨는 “재작년 대선은 차기 대선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면서 “영남 출신 후보가 나오지 않아도 영남 지지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도록 노 대통령의 동진정책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신 동진정책은 출발부터 삐거덕 거리고 있다. 6ㆍ5 재보선에서는 직격탄을 맞았다. 김혁규 총리카드와 영남특위가 정작 영남에선 전혀 효과를 내지 못하고 호남에선 오히려 역풍만 불러온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지난 5월 중순, 새 총리 후보로 김혁규 의원을 언급할 때만 해도 호남에서의 반발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대통령과 총리 모두 영남 출신이면 곤란하다”는 정도의 항의성 불만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영남권 인사들이 청와대와 협의, 김대중 정부시절 동진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동남발전특위’를 모델로 ‘영남발전특위’를 구성키로 하면서 논란이 가열됐다.

특히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입당(5월20일) 후 영남 출신의 한 핵심 측근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고, 6ㆍ5 재보선 이후 특위를 본격 가동키로 조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호남권을 중심으로 당 안팎에 반발기류가 형성됐다. 전남의 신중식 의원(고흥ㆍ보성)은 “영남이 40년동안 정권을 잡으면서 500대 기업 80% 이상이 영남 출신 소유고, 공직에도 영남권에서 요직을 점한 비율이 35~40%를 육박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열린우리당 의석이 적다는 이유 하나로 관료까지 참여하는 특위를 만들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며 비판했다.

영남특위 시비와 김혁규 총리론은 이번 재보선 과정에서 호남 민심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열린우리당의 영남발전특위 추진 움직임과 김혁규 총리카드가 도민의 반발을 사 우리에겐 호재가 됐다”고 말해 그 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광주의 한 중견언론인도 “‘호남차별론’이 민주당에 동정적 여론을 형성해 박준형 후보가 큰 표차로 이기는 요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노 대통령이 언급한 ‘민주대연합론’도 민주계 출신인 김혁규 의원에 대한 총리 지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측면이 있지만 결국 영남을 겨냥한 ‘동진정책’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차기 위한 장기 플랜

하지만 6ㆍ5 재보선 결과를 보면 신 동진정책 실험은 일단 실패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김혁규 총리카드, 영남특위, 민주대연합론도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김혁규 의원은 재보선 직후인 지난 6일 청와대를 방문, 노 대통령과 단독 오찬회동을 갖고 용퇴의 뜻을 전달했다. 청와대도 “재보선과 김혁규 총리 지명 문제는 별개”라는 종래의 입장에서 물러나 함구로 일관해 김혁규 총리카드가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동시에 민주대연합론도 담론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영남발전특위는 영남권 의원들이 여전히 “국회가 개원된 이상 원내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원외, 특히 영남권이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며 “당이 영남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라도 특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재보선 패배로 한풀 꺾인 양상이다. 영남의 한 초선 의원은 “영남특위가 야당의 정치 공세와 일부 언론의 갈등 조장식 보도로 취지가 훼손됐다”며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 변화를 꿰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위 명칭도 ‘균형발전특위’로 바꾸고 영남 외의 인사들도 참여하는 형태가 될 전망이다.

관심사는 노 대통령이 동진정책을 계속 밀고갈 것인지 여부다. 이에 대해 시각이 엇갈리고 있지만 청와대의 한 386 참모는 김혁규 총리카드가 처음 거론됐을 때 “그것(김혁규 총리카드)은 ‘장기 플랜’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 대목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장기 플랜’은 바로 ‘차기 대선’이다.

차기 대선의 길목이라던 4ㆍ15 총선과 노 대통령 집권 2기의 첫 시험무대인 6ㆍ5 재보선은 ‘압승’과 ‘참패’로 막을 내렸지만, 동쪽으로 향한 ‘바보 노무현’의 행진은 여전히 계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


입력시간 : 2004-06-0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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