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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부 흩날리는 삭풍의 여의도
의원 보좌관 수난시대
불안정한 신분 일방적 해고에 속수무책
우리당 살생부 파문으로 분위기 흉흉


한여름의 삭풍.

요즘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 주위를 감싸고 도는 이상기류다. 고실업시대에 의원 보좌진 자리가 파리목숨처럼 취급되면서 회관 주변에선 ‘하래불사하(夏來不似夏, 여름이 왔으나 여름같지 않다)’라는 자조섞인 소리가 들리고 있다. 삭풍의 진원지는 의원회관과 열린우리당 두 곳이다.


- 의원에 임면권, 말 한마디로 해고





지난 7월 중순, 재선의 K의원에게 보고를 하러 의원실로 들어간 L보좌관은 K의원으로부터 뜻밖의 통보를 받았다. “업무 스타일이 맞지 않으니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는 것이었다. 11년 가까이 특정 분야의 업무를 맡아 전문가라는 평가를 들어온 L씨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면직 이유도 그러했지만 의원의 말 한마디로 졸지에 실업자가 되는 현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였다.

17대 국회가 개원한 5월 30일부터 7월 말까지 면직된 보좌진은 52명(인턴 제외)에 이른다. 2개월간 하루에 1명 꼴로 보좌진이 국회를 떠난 셈이다. 정당별로는 한나라당이 25명으로 가장 많고, 열린우리당이 23명, 민주당 2명, 민주노동당과 자민련이 각각 1명씩이다.

보좌진 임용은 공채나 인턴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결국 의원의 재량으로 선발한다. ‘국회의원의 수당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직무를 보좌할 수 있는 인원을 둘 수 있다. 현행법상 4급 2명과 5ㆍ6ㆍ7ㆍ9급 각 1명씩, 인턴사원 2명 등 모두 8명을 둘 수 있지만 임면 권한은 전적으로 의원에게 있다.

그래서 보좌진의 신분은 매우 불안정하다. 앞서 L보좌관의 예에서 보듯 국회의원의 일방적 통고로 언제든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개월 동안 물러난 52명의 보좌관 중 자의적으로 그만둔 경우는 절반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 백원우 의원실의 추연윤 보좌관(7급)이나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실의 이완섭 보좌관(4급)처럼 사회복지사나 개인사업을 위해 그만둔 경우도 있지만, 열린우리당 K의원실의 K보좌관과 한나라당 K의원실의 C보좌관은 각각 역량 부족과 호흡 불일치를 이유로 물러났다고 하나 ‘일방적 해고’라는 게 동료 보좌관들의 지적이다.

국회 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17대 국회는 초선이 180여명이나 돼 전문인력을 요구하다 보니 의원의 기대에 못 미쳐 그만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면서 “그러나 보좌진의 이동을 보면 문제성 있는 의원이 눈에 띈다”고 덧붙였다. 법조 출신의 재선 의원과 일하고 있는 경력 6년차의 한 보좌관은 “주변에서 그만둔 보좌진을 보면 능력보다는 의원들의 성격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면서 “보좌진들이 버티지 못하는 유명의원이 3~4명 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보좌진 중엔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상의 약점을 잡고 자리를 보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한나라당 보좌관협의회의 한 간부는 “자리가 불안하다는 게 보좌관들의 가장 큰 고민이지만 특별한 대책이 없는 게 현실”이라면서 “보좌진 간 정보교류와 네트워크로 역량을 강화해 인정받는 보좌진이 되게 하는 게 방안이라면 유일한 방안”이라고 말해 보좌진직의 불안정성이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됐다.

국회 삭풍의 또 다른 진원지는 열린우리당 ‘노동조합’판 살생부다. 7월 16일 출범한 사무처 노동조합(위원장 김완수)이 지난 3월,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할 때 찬성표를 던졌던 한나라ㆍ민주당 의원의 보좌진 가운데 4ㆍ15 총선 뒤 열린우리당 의원의 보좌진으로 기용된 이들을 대상으로 소속의원에게 경질을 촉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노조에 따르면 현재까지 살생부 대상에 오른 보좌진은 줄잡아 6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파문이 확산되자 노조는 “살생부 명단을 작성했다거나 50여명의 경질을 촉구했다는 대목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노조원들 사이에선 “명단이 확보돼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회자되는 상황이다.


- "살생부 명단 있다" 파문 확산 조짐

살생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보좌진들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우려를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고 있다. 특히 ‘살생부’가 언론(7월 22일자 중앙일보)에 알려진 시점이 열린우리당 보좌진협의회 초대회장 선거가 진행되던 때란 점을 주목한다. 당시 처음 출마를 선언한 사람은 민주당 박주선ㆍ김영환 전 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조모씨로 당선이 유력했는데 열린우리당 창당파 사이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전대협 부회장 출신의 강현호 보좌관을 내세워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킨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K의원실의 L보좌관은 16대 국회에서 보좌한 의원이 민주당 동교동계 핵심으로 열린우리당 창당을 앞장서 반대한 인사여서 불똥이 튀지않을까 불안해했다. 그는 “열린우리당 의원이 대부분 민주당 출신인데 이제 와서 ‘혈통’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보좌진 출신들은 “친노세력과 개혁당 출신이 우리를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 아니냐”며 반문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노조측은 살생부 파문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며 빠른 시일내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이강률 사무국장은 “문제의 본질은 당 정체성을 찾자는 것이다. 탄핵과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파문은 일부 의원과 보좌진이 당 정체성과 배치되는 행태를 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집권 여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정체성 회복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살생부의 존재여부에 대해 “지금도 문제 있는 보좌진들에 대한 제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면서 “당 정체성을 심각하게 해치는 의원과 보좌진에 대해선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노조는 7월30일 지도부 회의를 열고 △조합원 설문조사 △당 보좌진협의회와의 협의 △지방 당원과 사무처 직원의 보좌진 진출 방안 등을 논의했다. 노조는 최근 진행되고 있는 당헌 당규 개정안에 ‘기간 당원’의 요건을 강화, 당 정체성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살생부 파문과 관련, 열린우리당 보좌진협의회 1대 회장인 강현우 보좌관(임채정 의원)은 “특별한 입장은 없지만 논의를 해오면 들어보겠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보좌진들의 의정활동을 보좌하고 의원ㆍ보좌진 간 네트워킹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 관심 순위에서 노조와 차이를 나타냈다.

열린우리당 대다수 보좌진들은 초선 의원이 많아 호흡을 맞추기 어렵고, 갈등이 상존하는데 노조의 움직임이 의원의 전횡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다며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보좌진의 무덤이라는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의원회관 안팎에서 삭풍의 조짐이 거세지고 있어 보좌진의 한여름은 무덥지만은 않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


입력시간 : 2004-08-05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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