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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과거사 전쟁' 포연 자욱
노 대통령 선공에 한나라당 용공으로 응전, 2007 대선 염두에 둔 기싸움



노무현 대통령이 8·15 경축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하한정국을 달구었던 ‘정체성’ 논쟁이 가을 문턱을 넘어 ‘과거사’ 전쟁으로 확전되고 있다. 전쟁의 주역은 여전한데 전세는 여권이 주도권을 쥔 형국으로 역전됐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7ㆍ19 전대 직후 국가 정체성 문제를 내세워 ‘전면전’을 선포할 때만 해도 전선은 야당과 박 대표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고 정체성 논란에 내재된 ‘과거사’라는 속성을 건드리면서 전선은 여권쪽으로 급변했다. 노 대통령은 7월29일 전남 목포에서 열린 광주·전남 지역혁신발전 5개년 계획 토론회에서 “지금의 정치적 전선은 과거 유신시대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미래를 선택할 것이냐는 기로에 서 있다”며 박 대표를 우회적으로 공격한데 이어 다음날(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선 “과거사 문제를 단편적으로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고 말해 ‘과거사’ 전쟁에 불씨를 지폈다.


- 노 대통령 "과거사는 국가적 문제"

노 대통령은 나아가 8ㆍ15 담화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분열과 반목을 가져온 굴절된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며 과거사 규명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고 국회 차원의 ‘과거사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의해 ‘과거사 정국’을 선도했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특위’를 국회의장 산하 자문기구로 둘 것을 야4당에 공식 제의하고 국가정보원은 시민단체와 함께, 국방부는 군내에 각각 '과거사 청산 시스템' 구축에 나서는 등 정부여당과 국가기관이 노 대통령이 주도하는 과거사 정국에 힘을 실어줬다.

여권은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 부친의 친일경력(헌병 오장)으로 역풍을 맞기도 했지만 신 전 의장이 스스로 물러나 여당 대표마저도 ‘친일’에 연루되면 심판받게 된다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오히려 ‘과거사 정국’이 급물살을 타게 했다.

과거사 정국의 높은 파고는 곧바로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를 덮쳐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과거사 특위 구성 제안’에 적극 찬성의 뜻을 밝혀 한나라당을 압박했고, 민족정기선양회, 독립유공자유가족협회 등 14개 시민단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전력을 이유로 박 대표의 정계 은퇴를 공식 촉구했다. 수세에 몰린 한나라당은 19일 박 대표가 “과거사를 포괄적이고 대폭적으로 진상 규명해야 한다”며 과거사 규명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 과거사 정국은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최근 여야의 과거사 전쟁은 국가 정체성 논란에서 비롯된 노무현-박근혜 대결의 연장선에 있다. 차이라면 전면이든 배후이든 노 대통령의 그림자가 더욱 뚜렷한데 반해 박 대표는 방어에 급급해하고 훨씬 넓어진 전선에서 노 대통령이 우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과거사 전선은 열린우리당의 경우 신기남 전 의장이 도중 하차한 뒤 이부영 신임 당 의장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 이 의장이 선봉에 나서고 ‘과거사청산 태스크포스’(단장 원혜영 의원)가 전선을 구축한 반면 한나라당은 박 대표가 직접 앞장선 가운데 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소장 박세일)가 맞대응을 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과거사 정국은 진상규명 기관에서부터 규명 대상ㆍ범위ㆍ시기 등이 확정되지 않아 장기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여권에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과거사 논쟁은 역사의 진실찾기라는 본질과 별도로 여야의 생존게임과 2007년 대선까지 연계된 정치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진두지휘하고 여권이 ‘올인’식으로 참여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 한나라 "2007 대선 겨냥한 고도의 전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는 박형준 의원은 “과거사 문제가 단기적 사안이기는 하지만 여권의 중장기 플랜에 따라 이뤄지는 사항이기도 해 장기전략을 연구하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여권이 ‘전면전’으로 나오는 것은 경제ㆍ민생 붕괴에 따른 노 정권의 위기를 다른 아젠다를 띄워 돌컸構?멀리는 2007년 대선을 겨냥한 고도의 전술”이라고 지적했다.

신기남 우리당 의장이 부친의 친일문제로 의장직을 사퇴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가에서는 과거사 정국이 명분상 여권이 우위에 있고, 박근혜 대표가 직접 타깃인 점, 그리고 노 대통령의 노선 변화로 등을 돌렸던 일부 노사모와 시민단체 등이 과거사 문제를 계기로 다시 결집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여권에 ‘남는 장사’라고 분석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여론조사기관인 TNS에 의뢰, 지난 17일 전국의 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과거사 규명을 강조한 노 대통령이 8ㆍ15 경축사에 대해 공감한다는 응답이 62.1%로 부정적인 응답(34.9%)보다 두배 가까이 높게 나온 것은 과거사 정국의 풍향을 가늠케 한다. 민주화 유족협회와 통일연대 등 600여개 진보 단체들이 노 대통령의 ‘先-과거사 규명, 後-용서와 화해 및 보상’ 방침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자발적으로 청와대와 정부기관, 그리고 국회의 과거사 진실 규명에 대한 지지활동에 나설 것으로 알려져 여권에 더욱 유리한 형국이다.


- 신기남 사퇴 계기, 박 대표 압박

박근혜 대표가 과거사 조사범위에 ‘용공ㆍ친북’ 행위를 포함시키자고 제의한 것은 다분히 노 대통령 장인의 좌익전력을 겨냥하고, 과거사 공방의 불리함을 희석시키려는 측면이 있지만 전선을 역전시키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박 대표가 최근 과거사 정국에서 한발짝 물러나 민생투어를 다시 시작한 것은 결과가 뻔한 게임은 당에 맡기고 ‘민심’을 확보, 여권의 아킬레스건을 치겠다는 행보로 풀이된다.

열린우리당은 ‘신기남 사퇴’를 계기로 박 대표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박 대표가 차기 유력한 대권 주자인데다 무시 못할 대중성과 한나라당의 대표성이 뚜렷해 박 대표에 대한 공격이 과거사 전쟁의 결정타라는 판단에서다. ‘과거사청산 태스크포스’의 원혜영 단장이 최근 SBS와 CBS 라디오에 잇따라 출연해 “과거사 문제를 연좌제의 개념을 가지고 봐서는 안된다”며 박 대표를 직접 겨냥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현재 여야 간에 진행되고 있는 과거사 전쟁은 대상이 ‘과거’일뿐 현재의 전쟁이고 미래의 전쟁이다. 전선은 궁극적으로 2007년 대선에 앞두고 유리한 대선 고지 선점을 위한 예비전 성격도 띠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승리자가 현재와 미래의 월계관을 쓰게 될 지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역사이고 정치이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


입력시간 : 2004-08-2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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