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정국, 여야 궤도수정정치권 흐름 일순간에 뒤바꾼 색깔론, 탈출구 없는 공방 장기화 전망

'이철우 사건' 폭로공세로 새 국면
국보법 정국, 여야 궤도수정
정치권 흐름 일순간에 뒤바꾼 색깔론, 탈출구 없는 공방 장기화 전망


국회법사위에서 국보법 상정을 놓고 여야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 이종철 기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 싼 대치가 이철우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을 계기로 뜻하지 않은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난 몇 달간 국보법 논쟁의 전략적 큰 그림을 구상해 온 여야 기획통들은 예상하지 못 한 돌발 변수 출현에 부랴부랴 전략 수정에 돌입했다.

‘이철우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만 해도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국보법 폐지안의 법사위 상정 강행을 통해 당 내외에 ‘개혁 의지’를 천명하는 상징적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대치 국면을 끝내려 했다. 몸싸움 끝에 법사위에 법안을 상정한 바로 다음 날, 천정배 원내대표가 예상되는 반발을 무릅쓰고 “국보법 연내 처리를 유보한다”며 발표한 결정 사항도 한나라당을 대화 테이블에 끌어 들여 기금관리기본법 등 ‘뉴딜 3법’을 비롯한 쟁점 법안에 대한 협조를 구하고자 함이었다.

여기에는 뾰족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제난 해결을 위해 최소한의 조치를 당이 책임지고 취해 줘야 한다는 청와대와 정부의 요청과 이를 적극 수용한 당내 중진들의 목소리가 작용했다. 친노(親盧)직계 그룹으로 분류되는 문희상 의원이 천 대표의 “국보법 연내 처리 유보” 결정에 힘을 실어 줬고, 이광재 의원도 천 대표의 발표 뒤 “어렵고 힘든 결단”이라고 옹호하고 나선 대목이 이를 방증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권은 국보법 외의 다른 3대 법안의 연내 처리도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언론에 흘렸다. 김원기 국회의장이 여야 지도부에 “4대 법안의 연내 처리를 유보하는 것을 담보로 임시 국회를 열자”는 제안을 던진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받아 들여졌다.

우리당, 강경론으로 급선회 계기
단순하게 보면 이 같은 여권의 움직임은 사실상 ‘4대 입법’의 포기 선언에 다름 아니어서 정국 주도권은 전략 구사의 폭이 넓은 한나라당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국면이었다. 하기에 한나라당 내에서도 ‘법사위 대격돌’의 냉각기를 거친 뒤, 여야간 모종의 주고받기가 성사되리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하지만 국보법 논쟁이 예정된 흐름대로 가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 등이 8일 ‘이철우 사건’을 국회 본회의에서 폭로하면서 흐름은 일순간에 헝클어졌다. 열린우리당은 “색깔 공세 이상의 윤리적 패악”이라고 이를 규정, 강경론으로 급선회했다. 당내 온건 보수파까지 “좌시할 수 없다”고 분개의 목소리를 냈고, 천 대표도 ‘국보법’ 처리 속도 내기에 돌입했다. 한나라당 역시 이 의원에 대한 판결문 등을 바탕으로 집요한 ‘간첩 공세’를 펴는 한편, 국보법이 유지돼야 할 현재적 근거로 이번 사건을 적극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어느 한 쪽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승부가 나지 않는 칼끝 대립인 셈이다. 이에 따라 ‘이철우 사건’을 계기로 크게 증폭된 국보법 논쟁은 여야간 특단의 결단이 없는 한 적어도 임시국회 및 내년 초까지는 초미의 쟁점으로 작용할 공산이 커졌다.

한나라당 의총에서 박근혜 대표 등이 국보법 폐지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 이종철 기자

정치권에선 내년 2월을 ‘국보법’ 논쟁의 마지막 라운드로 보고 있다. 열린우리당 법사위 간사인 최재천 의원은 “이제 천 대표는 국보법 폐지에 관한 한, 명운을 걸었다. 그 의지를 의심하지는 말라”고 전했다. 그는 “당분간 강경파의 목소리를 빌어 국보법 폐지론의 자락을 깔아나가는 한편, 전략적으로는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직권 상정’의 명분을 부여해 주는 작전을 구사해 나갈 것이다. 연내 처리는 장담 못해도 내년 2월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한나라, 정권과의 승부수로 확전
한나라당도 승패가 갈리는 결전의 시기는 엇비슷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 때까지 한나라당은 초강경 수단을 모두 동원, 보수 여론의 총집결을 도모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나라당은 이철우 의원 사건과 관련해 ‘진상 조사단’을 중심으로 이 의원 외의 범 여권 386을 겨냥한 파일 확보에 나섰다. 당 내에선 운동권 출신 여당 의원을 비롯해 노 대통령의 386 최측근, 시민 단체의 간부 등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정권과의 승부수로 논란을 확산시키겠다는 노림수다.

또한 여당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다름 없는 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 새해 예산안 처리 등에 대해 최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국보법 철회 요구의 지렛대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국보법 개정안 마련 작업을 서두르며 법리 논쟁에 대한 대비도 병행키로 했다. 박근혜 대표가 “열린우리당이 폐지안을 거두면 당장 오늘이라도 개정안을 내겠다”고 연일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이 같은 강경론에 대해 당내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극우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소장파 일부와 중하위직 당직자들 사이에서 파다하다. 하지만 원내 전략을 담당하는 당 관계자는 “다소 무리수로 비쳐질 수 있지만, 이런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대로 물러설 경우 고정 지지층에게 명분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면서 “만에 하나 종국 가선 국보법이 폐지되더라도 이를 막기 위해 우리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결사항전 했다는 인상은 심어 놓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민노당 정책공조 예상
한편 ‘이철우 사건’으로 확산된 국보법 논쟁의 효과는 민주노동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의 간극을 급속도로 좁혀나갈 것이 확실시된다.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폐지와 형법 개정안의 동시 처리 방침에서 국보법 폐지의 우선 처리 방법이 거론된다. 이것이 현실화 될 경우 민노당과의 찰떡 공조는 명약관화하다. 다만 양당 내부에서 강경파가 득세하는 현재의 정국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대화와 타협이 설 땅이 없어질 것도 분명하다. 상당 기간 이념만 난무할 국회에서 민생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는 우려는 그래서 나온다.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입력시간 : 2004-12-16 17:02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hifideli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