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입법에 발목잡힌 정치권, 여야 정치력 부재 드러내며 지리한 싸움

"실타래 정국, 실마리가 안 보여"
4대 입법에 발목잡힌 정치권, 여야 정치력 부재 드러내며 지리한 싸움

국보법을 상정하려는 우리당 의원들이 최연희 법사위원장을 포위한 가운데 최 위원장과 천정배 우리당 원내대표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 이종철 기자

국가보안법을 필두로 한 이른바 ‘4대 입법’ 논란으로 연말 정국이 뒤숭숭하다. 4대 입법→이라크 파병 연장 동의안 및 새해 예산안→뉴딜 3법 등 민생 경제 법안의 순으로, 혹은 역순으로 이어지는 연쇄적 차질의 고리를 끊을만한 정치력이 여야 모두에 부재한 이유로 정치권의 대립은 해를 넘길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소위 ‘3 + 1’이라는 용어로 국보법이 4대입법에서조차 분리되면서부터 난마처럼 얽힌 실타래의 단초는 국가보안법 문제에 맞춰졌다. 당장의 관심은 열린우리당이 당초 스케줄에 따라 연내에 국보법 폐지안을 처리할 수 있느냐에 모아진다. 역으로 따지면 연말은 한나라당의 1차 저지선이기에,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여야 대치가 더욱 첨예해질 공산이 크다.

여기에는 이철우 의원의 ‘조선노동당 가입 논란’을 거치며 이슈의 파괴력이 증폭된 것과 무관치 않다. 열린우리당은 당초 대야 유화 전략의 일환으로 ‘3 + 1’ 전략을 채택했고 한 걸음 나아가 천정배 원내대표가 4대 법안의 연내 처리 유보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이철우 사건’을 겪으며 강경론이 급속히 득세했다. “연내 처리를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는 명분에 주목하는 강경론은 재야파와 운동권 출신의 386ㆍ475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연내 처리를 위한 서명 운동에 돌입했고, 내부에선 삭발과 단식 등 김원기 국회의장과 당 지도부를 겨냥한 초강경 압박 수단도 논의되고 있다.

우리당 '국보법 연내처리' 강경론 득세
그러나 천 대표 등 지도부는 사정이 좀 다르다. 천 대표 임기의 숙원 과제가 국보법 처리라는 점에선 시간이 많지 않지만, 민생 현안 등 산적한 다른 사안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한다. 즉 정국 정상화 방안과 함께 원내 전략을 설계할 수 밖에 없어 드러내놓고 국보법 연내 처리를 강행하기가 껄끄럽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던진 “4대 법안 합의 처리 약속시 국회 정상화” 카드에 대한 천 대표의 반응은 이 같은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 애초 천 대표는 “국회에 들어오는 게 우선”이라는 대전제하에 “법사위가 아닌 별도기구에서의 논의도 가능하다”며 정치적 타결을 배제하지 않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내용도 합리적으로 타협할 수 있다”고 법안의 절충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하지만 국회 정상화를 위해 원내 대표 회담이 거듭 열렸음에도 성과없이 끝나면서 지도부의 기류는 하루만에 강경론으로 선회했다. “국회 내에서 논의할 기구가 있는데 별도 기구 설치는 시간을 연장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이부영 의장), “지금 한나라당의 개정안 수준 가지고는 논의할 계제가 못된다”(천정배 대표) 등의 반응이 나왔다. 원내 대표단에서도 “한나라당으로부터 최소한 처리 시점에 대한 약속을 받아 내야 당내 강경론을 무마시킬 명분이 생기겠으나, 이조차 요원해진 상황에서 마냥 끌려갈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는 강경론으로의 선회 조짐이 엿보였다.

16일 김원기 국회의장 주선으로 국회정상화를 위한 여야 원내대표회담에 참석한 우리당 천정배,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가 회담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이종철 기자

그러나 “지도부가 현재 강온전략을 병행 구사하고는 있지만 연내 처리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는 게 천 대표 주변의 관측이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이 국보법에 대해 전향적 개정안을 마련해가는 상황을 무시한 채 국보법 폐지를 연내에 단독으로 처리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천 대표와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명운이 걸린 국보법 처리를 마냥 미룰 수도 없는 입장이어서 지속적인 명분 쌓기와 여론의 추見?살핀 뒤, 내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나라당 시간벌기, 전격처리에 경계심
한나라당은 긴장속에도 상대적으로 느긋해 졌다. 국보법 개정안에 대한 당내 입장 조율이 큰 마찰 없이 연착륙한 점이 ‘여유’의 배경이다. “당이 쪼개지지 않으면 국보법 개정안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이 파다했으나, 당초 우려에 비하면 영남 보수 진영의 일부 반발을 제외하곤 비교적 쉽게 당론이 도출돼 내홍은 일단 봉합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철우 사건으로 여론의 역풍을 초래하기는 했지만, 박 대표가 “4대 법안을 합의 처리할 것”을 제안한 덕에 소나기는 피했고 적어도 연말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는 여유도 한몫한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전략적 공감대가 당내에 형성돼 있는 것. 전여옥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박 대표의 제안으로 우리는 공을 넘긴 만큼, 이제 공이 넘어올 차례다”면서 “강경파 때문에 우리당 지도부가 중심을 못 잡고 있는데, 우리는 내년도 좋다. 기다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처리 시점이 약속돼 있지 않는 한, ‘합의 처리’ 제안으로만 시간을 벌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불안감도 크다. 김덕룡 원내대표의 한 측근은 “일단 국면 전환용으로는 성과를 거뒀지만 이것만 가지고 산적한 현안 처리의 담보로 원내 협상에 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더욱이 한나라당은 “새해 예산안과 이라크 파병 연장안은 다른 사안과 연계시키지 않겠다”는 발표에도 정치 상황이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게 하는 점이 부담이다. 자칫 민생 현안에 대한 지연 전술로 인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이 전격적으로 연내 처리를 강행할 가능성이 있고 키를 쥔 김원기 국회의장도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고 판단,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저지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김 의장이 제시하고 여야 지도부가 원칙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정치적 타결”의 구체적 방안을 추가적으로 내 놔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열린우리당에서도 마찬가지로 검토되고 있다.

요컨대 양당 지도부의 정치력만이 국보법 대립의 난국을 풀 수 있다는 것이지만, 천정배 김덕룡 대표가 그만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냐에 대해선 회의적 시각이 많다. 이와 관련해 김기만 국회의장 공보실장은 사석에서 “양당 원내 대표단이 표면적으로 원내 협상권을 위임받기는 했지만, 당 내부로부터 지도력을 충분히 인정 받지 못하고 있어 정국이 풀리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입력시간 : 2004-12-22 17:02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hifidelit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