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합의하면 정상회담 성사에 러시아가 중요 역할 할 것"북핵문제는 북의 비핵화와 미국의 체제보장·경제제재 푸는 일괄타결 방식이 바람직

[인터뷰] 발레리 수히닌 러시아 부대사
"남북 합의하면 정상회담 성사에 러시아가 중요 역할 할 것"
북핵문제는 북의 비핵화와 미국의 체제보장·경제제재 푸는 일괄타결 방식이 바람직


북핵을 둘러싼 한반도는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이다.

2월 10일 북한이 갑작스레 ‘핵 보유,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하면서 봄소식은 영영 멀어진듯 하다. 남북 관계의 진전을 모색하던 노무현 정부는 아직 해법을 찾지 못했고, 대만의 핵무장을 우려해 북한을 압박하던 중국은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 미국과 일본은 엄포를 놓으며 북한 때리기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유독 러시아만이 종전의 대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6자 회담’의 틀에 북한을 참여토록 한 실질적 당사자여서 향후 북핵 딜레마에 러시아의 역할이 주목 받고 있다.

또 지난해 9월 노무현 - 푸틴 대통령의 정상 회담에 이어 오는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 행사, 11월 부산에서 개최되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서 한 - 러 정상 회담이에상돼 러시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지난해 8월 부임한 발레리 수히닌 러시아 부대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한국어 전담 통역이자 6자 회담 러시아측 차석 대표로 ‘한반도 문제 전문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3월 15일 오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수히닌 부대사를 만나 북핵 해법과 한 - 러 관계, 남북 공조 방안 등에 대한 견해를 들어 봤다.

- 작년 6자 회담 실무 담당자로 북한이 2월 10일 핵 보유와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한 것을 어떻게 보는가.

△북한의 2월 10일 발표와 그 이후의 성명 등을 종합해 보면 6자 회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올 수 있는 회담’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이 6자 회담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 분위기를 강조한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러시아는 원칙적으로 한반도가 비핵화돼야 한다는 입장이고 이것은 평화적 방법으로 모든 관련국들이 참가해 보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북한은 핵 보유가 안전 보장을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인데, 6자회담 당사국들이 한반도 비핵화 뿐만 아니라 북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결과로 합의가 모아지기를 기대한다.

-2003년 초 로슈코프 외무차관 겸 푸틴 대통령 특사와 함께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북핵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핵에 대한 북한의 솔직한 입장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반드시 그 때만이 아니고 북한은 자신들의 핵에 대해 숨기지 않고 얘기를 해 왔다. 즉 자기들의 안보가 보장돼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핵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데 주변 환경이 그렇지 못해 핵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핵 보유는 선택이 아니라 안보를 위협하는 국제적 환경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는 주장이다. 러시아는 북한의 주장이 일견 일리가 있다고 보지만, 궁극적으로는 핵 비확산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 최근 북한이 6자 회담 복귀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내용을 보면 미국을 겨냥한 듯하고 미국 또한 북핵에 대해 북한과 시각차가 큰데 러시아와 북한,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6자 회담 재개를 위한 러시아의 역할이 있다면.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와 깊은 인연이 있고 미국과는 오랫동안 파트너쉽을 유지해 온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양쪽(북한, 미국)이 정상화되고 불행이 없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6자 회담이 잘 돼야 하는데 최대의 관건을 쥐고 있는 미국과 북한이 합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러시아는 다른 관련국들과 함께 미국과 북한이 합의를 할 수 있는 동기를 보장하고 두 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러시아가 북한과 미국의 2자 회담을 주선할 용의는 없는가.

△2자 회담은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 전례도 있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북미간 직접 대화가 북핵 문제 해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면 러시아는 중재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 2자 회담을 원하지 않는데다 6자 회담의 틀이 형성돼 있으니까 여기서 회담을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한다.

- 북한이 6자 회담 불참을 선언한 것은 회담에 참여할 경?북핵의 당사자로서 나머지 5개국으로부터 ‘피고’ 취급을 당할 뿐, 얻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북한이 6자 회담의 피고가 될 것이라는 분석은 잘못된 것이다. 북한은 6자 회담 성원국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중국과는 1961년 이래 ‘조중 우호 협조 및 호상 원조에 관한 조약’을 유지하고 있고, 러시아와는 2000년 2월 ‘조러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적이 있다. 한국과는 2000년 남북한 정상 회담에서 ‘6ㆍ15공동선언문’을 작성했고 미국과는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공동 성명을 낸 바 있다. 일본과도 정상 회담을 하고 공동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나. 6자 회담은 5 대 1로 나뉘어서 하는 게 아니라 여섯 당사국이 함께 한반도 비핵화 과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평양을 방문한 발레리 수히나(뒷줄 왼쪽 첫번째) 부대사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그럼에도 미국의 라이스 국무장관은 북한을 ‘폭정의 전초 기지’라며 대북 핵 포기 강경책을 고수, 이것이 6자 회담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런 면이 없지 않다. 자국 입장에서만 문제를 보기 ??문이다. 상대방에 대해 일종의 친절성을 보이고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해결책이 나오는데 현재 양쪽(북한, 미국) 모두 상대방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타협점을 찾지 못 하고 있다.

- 미국은 북핵 문제를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하려는 입장인데.

△그렇게 되면 북한에 대한 제재 조치가 논의되고 한반도에 긴장이 조성될 가능성이 높다. 6자 회담이라는 해결 방안이 있는 만큼 6자 회담 틀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그렇다면 북핵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현재 북핵 문제는 핵 비확산이라는 세계적 과제와 북미간 대결이라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일괄 타결’ 방안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미국과 북한은 직접 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고 6자 회담은 그러한 과정의 중요한 방식(틀)이라고 본다.

- 현재의 북핵 문제는 1994년 북ㆍ미간 제네바 합의에서 출발한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의 대북 중유공급 중단과 이에 반발한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가 배경이다. 러시아 극동 사할린 지역의 에너지를 북한에 공급해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른바 ‘사할린 프로젝트’에 대한 입장은.

△사할린 프로젝트는 러시아를 비롯한 남ㆍ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할린 지역에서 에너지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미국, 일본, 인도 등과도 관련이 있다. 북한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문제는 가스관 설치 등 현실적인 이유 외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북핵 문제를 에너지 공급과 연계시킨다면 제네바 기본 합의에 따라 북한은 NPT에 복귀하고 KEDO의 중유 공급이 재개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 오는 5월 러시아가 모스크바에서 개최할 ‘제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행사’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북한, 미국, 중국, 일본 등 6자회담 당사국의 최고 수뇌부가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6자 회담 재개의 가능성과 함께 남북 정상 회담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데.

△승전 60주년 행사는 6자 회담 실무자들이 아닌 각국 정상들이 참석할 예정이고 6자 회담 장소는 베이징이기 때문에 6자 회담 문제가 진지하게 거론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남북 정상 회담은 서울과 평양의 양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 한국에서 남북 정상 회담 개최 문제가 화제가 되면서, 러시아 극동 지역이 그 개최지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러시아의 역할이 주목되는데.

△남북간에 정상 회담에 대한 합의가 있다면, 회담을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하는 데 아무런 문제점이나 장애가 없다고 본다. 남북 당국이 합의를 할 경우 러시아에서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러시아는 언제든 도와줄 생각을 갖고 있다.

- 최근 한국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극동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고려인 자치주’ 문제에 대해.

△고려인은 모스크바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데, 연해주에는 자치주(구)를 이룰 만큼 인구가 많지 않다. 엄연한 러시아 국민으로서 고려인들의 문화 자치를 인정하는 ‘문화 자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 그 동안 푸틴 대통령의 3차례에 걸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 회담, 두 대통령 특사(로슈코프, 폴리코프스키)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 등에서 통역자로서 김 위원장을 가까이서 지켜 봤을텐데 어떤 인물로 평가할 수 있나.

△평가를 할 위치에 있지 않다. 굳이 인상을 말한다면 남북 관계 발전에 관심이 많고, 특히 국민이 잘 사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발레리 수히닌 러시아 부대사
푸틴 속내 가장 잘 아는 한반도문제 전문가

발레리 수히닌 러시아 부대사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한국어 전담 통역이자 6자 회담 러시아측 차석 대표를 역임한 최고의 한반도 전문가다.

지난해 8월 부임한 수히닌 부대사는 2000년 푸틴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단독 면담 통역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2001년과 2002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 간 단독 회담, 지난 2001년 푸틴과 김대중 전 대통령 서울 회담 등에서도 통역을 전담했다. 수히닌 부대사는 지난 1973년 북한 김일성대학 조선어학과를 졸업한 뒤 이듬해부터 북한 주재 러시아대사관에 근무했으며 1985년부터 평양에 파견돼 7년 동안 참사관으로 있었다. 1992~1995년 아주 제1과장을 역임한 뒤 1995~2000년 주한러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90년 한ㆍ러 수교 당시 1등 공신 역할을 한 유광모 박사(동북아연구원 위원장)는 “수히닌 부대사는 한국어를 가장 잘하는 러시아 외교관일 뿐 아니라 남북한에 정통한 한반도 전문가”라고 평했다. 외무부 내에서도 “수히닌의 움직임을 읽으면 한반도 관련 푸틴 대통령의 동정을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3-23 17:45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