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원유개발 전문가, 대선때부터 동북아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

'의혹의 핵' 허문석, 몸통인가? 희생양인가?
해외 원유개발 전문가, 대선때부터 동북아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

철도청(현 철도공사)의 러시아 사할린 유전 개발 의혹 사건(오일게이트)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중의 하나가 허문석(71) ㈜코리아크루드오일(KCO) 대표다. 오일게이트의 핵심 관련자들인 왕영용 철도공사 사업본부장, 전대월 ㈜하이앤드 사장 등이 한결같이 허씨에게 책임을 돌리고 허씨가 여러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번 사건의 ‘몸통’이 아니냐는 의혹도 뒤따른다.

반면 자원문제 전문가인 허씨가 국익을 위해 러시아 유전개발 사업에 전력하다가 유전사업이 게이트로 비화하면서 몸통을 구하려는 세력에 의해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이처럼 허씨에 대한 시각이 엇갈리고 의혹이 쏠리면서 그의 실체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허씨는 1960년 경희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73년 미시간 대학에서 ‘미시간 지역 북 대륙붕의 나이아가라 산호초에 관한 지질학과 그 속성작용에 따른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유지질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미국 시민권자인 허씨는 텍사코 석유회사 탐사연구실장을 지냈고 박정희 정권 당시 해외 과학자 영입 정책에 따라 국내로 들어와 70년대 초 동력자원부 설립과 함께 석유자원개발 정책자문을 지냈다. 허씨가 국내에서 석유탐사 전문가로 알려진 것은 1980년대 해외 원유 개발 1호로 기록된 마두라 유전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허씨는 민간업체인 코데코사(당시 사장 최계월)의 석유탐사 부사장으로 영입돼 1981년 5월 인도네시아 정부와 손잡고 발굴한 마두라 유전 사업을 진두 지휘했다.

이후 허씨는 인도네시아에서 석유 전문사업가로 변신, 1986년 ‘PTSEPCO’라는 감리회사를 차려 8,000여개에 이르는 인도네시아의 석유 정제시설을 관리했다. 허씨는 하비비, 메가와티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현 유도요노 대통령 등 인도네시아 정ㆍ관계 고위층과 인연을 맺으면서 한-인도네시아의 실력자로 통했고 2000년 5월 인도네시아 국회의장의 방한을 주선하기도 했다.

허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전 후원회장인 이기명씨와 고교 동창으로 2001년 이씨의 소개로 이광재 의원을 알게 됐고 2002년 대선 때 노 후보 진영에 참여한 이후 참여정부의 ‘동북아프로젝트’에 이 의원과 함께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씨가 이번 러시아 사할린 유전 개발 사업에 참여한 것은 동북아프로젝트의 일환인 셈.

그러나 허씨는 현재 오일게이트에 발목이 잡혀 있다. 왕영용 본부장은 “허 박사 말만 믿었다가 일을 그르쳤다”며 유전 사업 실패의 책임을 허씨에게 돌렸고 전대월 사장은 “허씨가 지분을 요구했다”“허씨 몫으로 60억원을 주기로 했다”는 등 허씨가 이권에 개입한 듯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러시아 사할린 유전사업을 처음 전대월ㆍ허문석씨에게 소개한 권광진 쿡 에너지 대표는 “작년 9월 허 박사와 만나 6개월 가까이 지내면서 그 분의 (유전에 대한)전문성과 인품에 크게 감명받았다”며 “유전 사업이 실패한 것은 허 박사와 무관하다”고 말했다. 권씨는 “허 박사는 재산이 많아 지분에 욕심을 낼 이유가 없고 명예를 중시했으며 어떻게든 (유전)계약을 성사시키려고 했다”며 “한국철도교통진흥재단이 갑자기 계약을 파기한 것에 게이트 비화의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전대월씨가 제시한 허씨 서명의 합의서, 각서 등에 이상한 점이 여럿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오일게이트 관련자들의 움직임을 볼 때 허씨를 이번 사건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흔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허씨는 지난 4월4일 인도네시아로 출국한 뒤 귀국을 미루고 있다. 허씨가 오일게이트의 몸통인지, 아니면 권력과 이권의 희생양인지는 그가 귀국한 뒤에나 확연해질 전망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4-28 14:43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