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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핵 위기는 네 탓"
책임 떠넘기기 막바지 게임
미국, 핵실험 임박설 등 흘리며 북한 고립시킬 명분 쌓기
북한, 위기 고조시키며 대미협상 겨냥한 전략적 대응




미국 첩보위성이 촬영한 영변 핵시설.



북한이 최근 보란 듯이 핵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11일 영변 원자로에서 8,000개의 폐연료봉을 꺼내는 작업을 끝냈다고 발표했다.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9일(미국 시각) ‘북한은 주권국가’이며 ‘6자 회담 내 양자 대화가 가능하다’고 공언함으로써 6자 회담에 대한 희망적 예측이 나온 지 하루만의 일이다. 평양 당국은 최근 미국의 유화적 제스처를 근본적 태도 변화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자립적 핵 동력 공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면서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는 방위적 목적에서 핵 무기고를 늘리는 데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영변에서 꺼낸 폐연료봉 8,000개는 핵무기 2~3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실험을 기다린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 위협에 대해 여전히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며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한 명분 쌓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는 당장 북한을 제재할 수단이 없는 미국으로선 어쩌면 북한의 핵실험을 기다리는 측면도 있을 것이란 시각도 없지 않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할 국제적 명분을 구축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리처드 루거(공화) 미 상원 외교위원장은 11일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면담한 뒤, 미국은 북한이 핵 실험을 할 경우 러시아가 북한 핵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는 데 찬성할 것으로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도 필요할 경우 입장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워싱턴의 북핵 전문가들은 부시 행정부의 향후 북핵 대처 방향은 군사적 옵션이 아니라 북한을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5대1, 적어도 4대2의 대(對)북한 압박 구도를 만들려고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미국이 생각하는 변수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핵실험을 했을 때 한국을 대북 압박 구도에 동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6월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이 한국 입장에서 심각한 담판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이런 정황에 기인한다.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말대로 이번 회담을 미국이 먼저 요구한 것이라면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것임을 상정해 한국측에 ‘추가 조치’(2003년 한미 정상회담 합의 사항)를 요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국 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아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 임박설, 대(對)북한 폭격 준비설 등을 흘리는 것도 중층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무하는 설(說)은 북한을 고립시키는 명분을 쌓는 동시에 중국과 한국 정부의 대북 제재 동참을 끌어내기 위한 포석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5월 들어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쏟아진 각종 ‘위기설(說)’들은 북한과 미국이 핵 위기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기 위한 계산된 게임 양상을 띄고 있다.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

뉴욕타임스는 8일 미 행정부의 일부 관리들이 각종 정보에 대한 결론을 행정부 정책 방향에 맞추도록 압력을 가한 사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핵실험 등 북핵과 관련된 정보가 부풀려지거나 왜곡될 가능성을 거론하며 종전의 북한 함경북도 길주의 핵실험 준비 갱도 공사설 보도에서 한발 물러섰다. 아사히신문 역시 9일 북한의 핵실험설은 북한의 의도적인 부풀리기거나 아니면 미 정부에 의한 정보 조작일 수 있다며 신중한 보도태도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최근 평양을 방문한 재일 조총련계 조선대 모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길주의 핵실험 준비설은 평양 당국이 대내외 과시용으로 흘리는 인상이 짙다는 것이다. 이미 평양에서는 북한 정권 창건 기념일인 9ㆍ9절(9월9일)에 핵실험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실제 강행의지도 배제할 수 없지만 향후 협상을 염두에 둔 상황 조절용 움직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도 10일 “북한도 핵실험 실시 후 그 중대한 결과에 대해 올바르고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북한이 섣불리 핵실험을 강행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만약 북한이 핵 실험을 하더라도 중국으로선 쉽게 북한을 고립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란 게 일반적 견해다. 중국은 동북아에서 미국과 전략적 이해를 달리한다는 이유에서이다.

북한, 벼랑 끝 전술·유화책 병행할 듯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퍼시픽 포럼의 브래드 글로서만도 이런 견해에 힘을 보탠다. 중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보다 체제붕괴 가능성을 더 우려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베이징 당국은 북한 생존의 아킬레스건인 대북한 에너지 공급 중단 등 미국측 요청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중국은 북한의 현 체제가 붕괴되면 수 백만 명의 난민들이 중국 국경으로 몰려들고, 한국이 북한을 접수하고 더욱이 미군이 중국 국경까지 진출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였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학장은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한다고 해도 당장은 근본적 상황 변화는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북한의 핵실험이 미국에 군사 행동의 근거를 제공하는 금지선(red line)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부시 행정부의 금지선은 핵 물질의 이전이라고 본다. 특히 그는 북핵 문제의 핵심은 군사적 조치가 아니라 북한의 정권교체의 문제라는 시각이다.

이 점에서 세종연구소 백학순 남북관계연구실장도 견해를 같이 한다. 백 박사는 지금까지 미국의 대북한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붕괴였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북한이 핵실험을 하더라도 달리 대응 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상황이라고 평가된다. 백 실장은 부시 행정부가 이제 대북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양자 회담을 위한 ‘대담한 카드’를 준비해야 핵 위기 교착을 풀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동시에 한국 정부도 상호주의를 넘어선 과감한 경협과 지원을 통한 대북한 지렛대를 마련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유효한 북핵 돌파구라는 것이다.

최근 인도적 차원의 대북 비료 20만톤 지원이 자칫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비료는 농사 일정상 대개 5~6월에는 북한에 전달돼야 하고, 현상황에서 북한이 당국자 회담에 응하길 마냥 기다릴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인도적 차원이든 대북 영향력 제고 차원이든 비료는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와중에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12일 이례적으로 정부는 북한에 조건 없이 비료를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 의원은 정부가 인도적 차원의 비료 지원에 전제 조건을 걸어 오히려 북한 당국의 불신을 자초해 남북관계를 꼬이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불참으로 6월 중 세계식량기구(WFP)의 대북 식량 지원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7~9월에 한차례 극심한 식량난이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외부 식량지원 중 60%의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으로부터 지원을 제때 못 받는다면 북한의 식량사정은 내년 4~6월에는 아사자가 속출했던 1990년대 중반의 상황으로 전락할 것은 분명하다. 결국 북한은 심각한 내부 위기를 겪게 될 것이란 얘기다. 이런 정황에서 북한은 핵 실험 강행 전에 기존의 벼랑 끝 전술과 함께 적어도 한번은 유화 국면을 모색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  


입력시간 : 2005-05-1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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