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에 없었던 일정, 미국 의도 파악 위해 부랴부랴 성사

정동영·김정일 면담은 라이스의 힘?
예정에 없었던 일정, 미국 의도 파악 위해 부랴부랴 성사

정동영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이 오찬회동을 갖고 있다. 오른쪽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통일부 제공>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단독 면담이 여전히 화제다. 정치권에서는 정 장관이 “대권 행보에 날개를 달았다”는 분석과 함께 8월 15일 남북정상회담설도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정 장관과 예정에도 없던 면담을 가진 내막을 들여다 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김 위원장이 ‘깜짝쇼’를 벌인 배경에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베이징의 대북 채널에 따르면 5월 17일 개성에서 11개월 만에 남북 차관급회담이 열리는 동안 평양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 날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보도 때문이었다는 것. 니혼게이자이는 “북한이 핵문제의 일괄 타결을 위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을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북한은 그러한 뜻을 중국에 전했고 리자오싱 외교부장이 5월 13일 라이스 장관과의 전화 회담 때 북한의 그 같은 의향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평양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란은 라이스 국무장관을 평양에 초청하려는 계획을 사전에 중국에 알린 내부 스파이를 색출하는 것이었다는 게 대북 채널의 전언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11개월 만에 열린 남북회담을 통해 라이스 초청 계획을 남측에 알리면 한국은 곧바로 그 같은 사실을 미국에 전달해 라이스의 평양 방문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라이스가 방북할 경우 영변의 핵시설과 주변에 배치한 화학탄, 세균탄 등을 직접 보게 해 지난해 워싱턴을 중심으로 확산된 ‘10월 충격설(October Surprise, 북한 공격)’이나 올해 초부터 불거진 ‘6월 폭격설’ 등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시키려 했다는 게 대북 채널의 설명이다.

만일 미국이 영변을 폭격할 경우 10월 이전에는 바람이 서북 방향으로 불어 화학물질과 세균이 바람을 타고 중국 동북3성에 미쳐 최소 1,000만 명 이상이 희생될 수 있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0월 이후에 폭격할 경우에는 바람이 남쪽으로 불어 한국과 일본에서 유사한 피해가 발생해 사실상 폭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남→북으로 이어진 대북메시지
대북 채널에 따르면 북한의 의도를 간파한 미국은 역공에 나섰다. 선봉에는 북한의 초청 대상이었던 라이스 장관이 섰다. 라이스는 북한을 “폭정(暴政)의 전초기지”라고 비판한데 이어 5월 16일 이라크 방문후 귀국길에 아일랜드에 도착해 “북한이 핵으로 국제 사회와의 대치 상태를 증폭시키려 할 경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분명한 경고를 보냈다. 라이스의 그러한 대북 메시지는 6월 11일 한미 정상회담 때 부시 대통령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으로 전해진다.

정동영 장관은 6월 16일 저녁, 김영남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단독 면담에서 미국의 대북 압박의 실체를 전했고 이것은 곧바로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됐다는 게 북한 소식통의 전언이다.

평양 사정에 정통한 북한 전문가에 따르면 미국의 대북 압박카드에는 김정일 위원장을 교체하는 수준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김 위원장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라이스가 6월 16일(워싱턴 현지 시각) 국무부 기자 브리핑에서 북한의 6자 회담 복귀 여부에 대한 질문에 “공은 북한 쪽에 넘어가 있다”고 한 것은 미국의 대북 의도를 확인시켰다는 것.

김 위원장은 정 장관을 통해 미국의 대북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 했고 노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정 장관을 만났다는 게 북한 소식통들의 중론이다. 결국 김정일-정동영 면담은 미국의 대북 경고가 가져다 준 급조된 ‘선물’인 셈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6-30 17:12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