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드렁한 북 "현대는 통이 작아서…"

금강산 관광이 18일로 7주년을 맞았다. 1998년 11월18일 금강호가 첫 관관객 800여명을 금강산에 내려놓은 지 7년이 지난 지금 114만600여 명이 금강산을 찾았다.

이날 남측의 현대아산과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는 공동으로 금강산 관광사업 7주년 기념식을 금강산에서 개최했다.

기념식에는 남측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한 방문단과 관광객, 북측에서는 현대측 대화상대인 리종혁 아태위 부위원장 등 700여 명이 참석했다.

이틀에 걸친 기념행사 동안 남북은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였지만 어딘가 구멍이 난 듯한 인상을 남겼다. 김윤규 전 현대그룹 부회장 파문에서 비롯된 냉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까닭이다.

북측이 ‘야심가’로 지목한 현대아산 윤만준 사장과 최용묵 현대엘리베이터 사장은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김윤규 파동은 여전히 현대-북한 간에 숙제로 남아있다. 문제는 파동의 본질이 김 전 부회장의 거취나 현대-북한, 금강산 관광사업을 뛰어넘는데 있다. 남북 당국 간, 금강산 관광사업 이외의 사업에 비중이 실려 있다는 분석이다.

김윤규 파동은 지난 8월 김 전 부회장의 비리 내용을 담은 감사보고서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현대그룹이 책임을 물어 김 전 부회장을 그룹에서 축출하자 북한이 반발, 하루 금강산 관광객수를 600명으로 축소하면서 증폭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주영-정몽헌-김현규로 이어지는 현대가에게 7대 독점사업을 약속한 바 있는데 현대측이 그러한 신의와 신뢰를 저버리고 야심가들의 장난에 놀아났다는 게 북측의 주장이다.

리종혁 아태위 부위원장은 <통일신보> 9월17일 자 ‘6ㆍ15 시대와 금강산’이라는 기고문에서 “김윤규 부회장은 장군님께서 몸소 6ㆍ15 시대에 길이 전해갈 불멸의 친필을 남겨주셨던 남측인사다”고 해 그 같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현대의 김 전부회장 처리가 ‘김위원장에 대한 결례’라는 것이다.

김윤규 파동은 현대에 대한 불신

하지만 북한 고위층과 채널을 갖고 있는 베이징 소식통은 “김윤규 파동은 현대의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현대 자체에 대한 불신”이라고 말했다. 광범위한 남북경협 추진에 현대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에서다.

현정은 현대그룹회장이 11월 10일 북한 방문을 마친 뒤 기자들에게 방북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현대그룹 노치용전무, 현대택배 김병훈 사장, 현회장, 현대아산 윤만준 사장. (연합뉴스)

그는 “북한은 2~3년 전부터 내부 시스템을 변화시켜 남측 당국과 대범한 경협을 추진하려 하고 있고 수익 창출을 위해 현대보다 더 나은 파트너를 물색 중”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김윤규 사안이 터졌을 때 롯데관광을 거론한 것은 현대를 압박하면서 새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예라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개성관광사업을 비롯해 현대에게 부여한 7개 독점사업을 다각화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다.

소식통은 “7대 대북사업은 현대에 독점권이 주어졌지만 북한은 계약 내용을 ‘선언적 의미’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성욱 교수(고려대ㆍ북한학)는 “김윤규 사안에 대해 북한이 보인 태도에는 현대의 독점권을 허물려는 의도가 읽혀진다”고 분석했다.

80년대 말부터 베이징과 단둥을 중심으로 북한과 교역을 해 온 북한 전문가는 김윤규 파동에 대해 “예전의 현대가 아닌데 북한이 성이 차겠냐”고 잘라 말했다.

한마디로 자금력이 부족한 현대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게 북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금이 넉넉한 파트너가 생기면 북한은 언제든 손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베이징 소식통은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중국이 에너지와 식량 지원을 대폭 줄여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왔다”면서 “남한을 유일한 경협창구로 보고 대범한 변화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남한 당국을 직접 상대하려 한다. 현대는 빈털터리로 보고 관심이 떨어진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금강산 관광사업은 생산수단을 가동하지 않고 손쉽게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사업이지만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에 비추면 ‘코끼리 비스킷’ 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고위층의 말을 인용, “현대가 정몽헌 회장 때와 달리 요즘엔 남북경협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이 김윤규 파동으로 중단됐던 금강산 관광사업의 재개를 허락한 것도 외화벌이 측면보다 광범위한 남북경협을 위한 여론 다지기 차원에서 수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북한은 현대의 자금력과 더딘 사업 속도에 불만이고, 현대는 대북 독점사업권을 양보할 수 없다는 대립 속에서 김윤규 파동이 불거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현대-북한 간 불협화음과 무관하게 북한의 변화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진전으로 내년 초를 경계로 남북경협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북한이 7월29일 남한의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1990년 제정)에 해당하는 ‘북남경제협력법’을 제정한 것은 상징적인 조치라는 분석이다.

모두 27조로 구성된 ‘북남경제협력법’은 남북 경제협력의 원칙으로 ▲전 민족적 이익 ▲균형적 민족경제발전 ▲상호 존중 및 신뢰 ▲유무상통(有無相通·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한다) 등을 명시하고 있다.

베이징의 소식통은 “북한이 북남경제협력법을 제정한 것은 앞으로 대남 정책이 크게 변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 이면에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로 권부 2인자로 평가받고 있는 장성택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 부부장의 힘이 작용한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는 “8ㆍ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이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현충탑에 묵념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를 방문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취한 것은 북한 ‘변화’의 상징적인 조치”라고 말했다. 이제는 남한이 북한의 변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화답을 해야할 차례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북한이 그 동안 대남 경협을 총괄하던 아태평화위 산하의 조선민족경제연합회(민경련)를 대신해 총리 휘하의 ‘고려민족경제위원회’(2004년 7월 출범)에 힘을 실어준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임가공복무총국이 실질적 대남경협 창구

북한에 정통한 전문가는 “앞으로 고려민족경제위원회 산하기관인 ‘임가공복무총국’이 실질적인 대남경협을 맡게 될 것”이라며 “이는 남북 장관급 회담과 6ㆍ15 공동선언 기념행사에서 북측을 대표한 권호웅(권민) 내각 참사가 아태위에서 내각으로 옮겨와 남북대화의 주역으로 나선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북한이 거국적으로 남북경협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단계의 남북경협과 북방경제를 전담할 반관반민 성격의 남북협력공사(가칭)의 설립을 추진, 북한의 변화에 화답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남북 당국자간 경협 확대 추진 규모에 비하면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은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사업에 현대아산 윤만준 사장 등의 교체를 주장한 것은 현대의 행보가 광범위한 남북경협에 ‘딴지걸기’식으로 비춰진데 대한 우회적인 불만 표출이라는 것이다.

북한에게 윤 사장의 교체 여부나 김윤규 전 부회장의 거취는 큰 관심사가 아니며, 대범한 남북경협에 현대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를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 전문가들은 내년 초부터 단계적으로 추진되는 남북협력공사가 실질적인 대북 경협 창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남북 당국이라는 거인들의 주행에 현대가 어떤 행보를 취할 지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남북협상 새 얼굴 권호웅·라운석

권호웅(왼쪽) 내각참사, 라운석 민경련책임참사.

올 초부터 본격화한 남북 협상에서 북한의 새 얼굴이 주목받고 있다. 권호웅 내각참사와 라운석 조선민족경제연합회(민경련) 책임참사다.

권 참사는 지난 5월4일부터 나흘간 평양에서 열린 제14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이전의 김령성 단장과 교체돼 북측을 대표했다.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처음 대면한 이후 남북 대표자급 회담때마다 등장해 ??익은 얼굴이다.

권 참사는 1996년 미국 버클리대에서 열린 ‘ 한반도 평화통일 심포지엄’에 참석해 자신을 ‘ 김일성종합대 학생대표 권민’으로 소개하며 처음 알려졌다.

그 해 6월에는 북측의 대남교섭창구 중 하나인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 참사 자격으로 베이징 남북 차관급회담 북측 대표를 맡아 남측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권 참사는 강덕순 아태평화위 부실장의 측근으로, 권호웅이라는 이름은 2000년 7월 장관급회담 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남북 간 주요 회담에는 빠지지 않아 1999년 1~2차 차관급회담과 2000년 1~5차 정상회담 준비접촉에 각각 대표로, 1~5차 장관급 회담에서는 보장성원(실무진) 등으로 회담에 참가했다.

특히 남북 정상회담의 출발점이 된 99년 4월 베이징 회담과 2000년 4월 남북정상회담 준비접촉 대표회담에 실무진으로 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권 참사는 남북 정상회담 3개월 후인 9월,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인사에게 보내는 송이버섯을 들고 방문한 김용순 노동당비서를 보좌해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몇 해 전 내각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아태평화위에서 옮겨와 남북대화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라운석 참사는 최근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과 관련, 윤준만 현대아산 사장의 교체를 주장해 유명해진 인물이다. 현재 북한의 개성공단을 책임지는 중앙특구 개발지도총국 책임참사와 민경련 책임참사를 겸하고 있다.

라 참사는 윤만준 체제의 교체 이유로 “자기 집안문제를 끌어들여 언론에 유출하고 북한에 비자금을 전달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하는 등 신의를 저버린 야심가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북측을 의식해 최용묵 현대 엘리베이터 사장을 경질한데 대해서도 “현 회장의 쇼에 불과하다”며 거듭 윤사장 체제의 퇴진을 요구해 강경파라는 인상을 깊게 남겼다.

라 참사는 광복 60주년 8ㆍ15 민족대축전 때 서울을 방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남측의 여야 의원들과 가진 분과별 상봉 모임에서 북측의 대표 일원으로 참석했다.

권ㆍ라 두 참사를 잘 알고 있는 북한전문가는 “권 참사가 여느 아태평화위 사람들과 달리 유머 감각이 있는데다 두둑한 배포와 함께 남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 반해 라 참사는 이론적으로 무장돼 있어 논리싸움에 강하다”고 평했다.

또 “권 참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근무하는 등 해외경험이 있어 융통성이 있는데 반해 라 참사는 국내에만 머물러 고지식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라 참사가 논리로 무장돼 설득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대화가 되면 적극적으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있는 상대”라고 평가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