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국무총리가 ‘실세 총리’로 노무현 대통령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배경에는 두 사람 간의 ‘18년 인연’이 있다.

두 사람은 1987년 6월 항쟁 무렵 재야단체인 민통련 활동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이 총리는 서울의 민통련 본부 정책실장이었고, 노 대통령은 부산 민통련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87년 대선 뒤 정치권 진출을 결심한 민통련 활동가들의 모임(서울 탑골공원 근처의 한 여관)에서 머리를 맞댔다. 이후 이 총리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평화민주당으로, 노 대통령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으로 갈라졌다가 88년 13대 국회에 초선의원으로 나란히 진출했다.

두 사람은 상임위원회도 함께 노동위원회를 선택, 이상수 현 노동부 장관과 더불어 ‘노동위 3총사’주목을 받았다.

노 대통령은 90년 3당 합류를 거부하고 꼬마민주당에 남았다가 DJ의 평민당과의 야당 통합 때 당 개혁파 대표로 나서 평민당 소장파 대표로 나온 이 총리와 통합 논의를 주도했다.

92년 이 총리가 DJ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공천 탈락 위기에 놓이자 노 대통령은 “이해찬 같은 사람을 공천하지 않으면 나도 탈당하겠다”고 해 이 총리를 구했다. 97년 대선 때는 노 대통령이 몸담고 있는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를 DJ의 국민회의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과 이 총리는 양측을 대표해 통합을 추진했다.

98년 이 총리가 교육부 장관이 됐을 때 노 대통령은 국회 교육위원회를 선택, 이 총리의 교육개혁에 힘을 실어줬다. 2000년 8월 개각 때는 이 총리가 DJ를 만나 노 대통령을 해양수산부 장관에 추천했다.

2002년 대선 때 이 총리는 선거대책본부 기획본부장을 맡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2003년 초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첫 조각 때 이 총리에게 국가정보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총리는 고사하는 대신 한 달에 한두 차례씩 청와대로 불려가 노 대통령과 독대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6월 개각 때 이 총리를 기용했다. 대통령-총리라는 관계보다 ‘인간적으로 가까운 동료’라는 인식이 이 총리를 ‘실세 총리’로 만든 원천이었다.

이 총리의 3ㆍ1절 골프파문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18년 인연’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