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 미 대화 답보 상태 풀 묘수 놓고 평양 고심, 6자회담 복귀 등 선택에 주목

▲ 이근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이 3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 브리핑에 참석하기 위해 미 대표부로 들어가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모두 대북 제제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지만 이날 브리핑에서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 회담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반도 정세가 점차 구조적인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위조 지폐 문제로 꼬인 북·미 양자 대결구도에도 한국과 중국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

6자회담 우리측 수석대표인 천영우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장은 3월 22일 “지난 7일 북·미 간 뉴욕 접촉 이후 현재까지 이렇다 할 회담 재개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며 “현 단계에서 6자회담이 언제 재개될지 전망하기는 어렵고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앞서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3월 17일 서울대 총동창회 초청 강연에서 “한반도에 미묘한 정세 변화가 있다”며 심상찮은 기류를 전했다.

‘미묘한 정세 변화’란 무엇인가. 이 장관은 이에 대해 지난달 29일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미국에서 북핵에 우선 집중하는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핵 문제 하나가 아니라 북한의 개방의지 확인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고 인권 대화를 병행하는 게 어떠냐는 얘기까지 있다”며 “북·중 관계도 경제협력이 강화되는 움직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지난해 6자회담 9ㆍ19 공동성명이 나올 당시 경수로 문제로 북·미 양측이 얼굴을 붉혔던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9ㆍ19 공동성명이 도출될 때만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의 중재로 북한의 평소 요구가 모두 반영됐다며, 이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미국을 상대로 한 협상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은 당시 경수로의 ‘경’자도 공동성명에 넣을 수 없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적정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한다는 문안을 수용했다.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부시 행정부의 협상 원칙까지 훼손하면서까지 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 달 뒤 11월 미국이 북한의 위조 지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러한 해석들은 무색해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의 급반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미국의 동북아 전략 변화 의미

우선 9ㆍ19 공동성명은 미국이 협상에서 양보한 것이라기보다 동북아 전략의 수정에 따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상황 반전도 미국의 입장에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조성렬 박사는 “9ㆍ19 공동성명이 단지 북핵 문제 해결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의 형성이라는 근본적인 이슈를 담았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 분단과 중국을 겨냥한 미·일 동맹이라는 기존의 동북아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란 해석이다.

조 박사는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지난해 8월 로버트 졸릭 국무부 부장관을 베이징에 보내 한반도 현상 변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특히 미국에도 좋고 중국에도 좋은 한반도 장래 시나리오를 검토할 것을 촉구한 점에서도 미국의 전략 수정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이 6자회담을 동북아의 ‘다자 간 안보 틀(multilateral security framework)’ 마련을 위한 전략적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는 해석이다.

알다시피 부시 1기 행정부의 동북아 전략은 한-미-일 동맹 간 3각 네트워크 구축이란 그림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반발과 한국의 부정적인 태도로 이러한 구상은 효용성이 떨어졌고, 2기 행정부에 들어서는 중국을 현실적인 파트너로 인정하고 동북아 새 질서 형성에 관해 중국과 협의하는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의 틀을 추진하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워싱턴 포스트(WP)도 지난해 9월7일자에서 “라이스 장관과 졸릭 부장관이 중국 지도부와 함께 한반도의 경제ㆍ정치적 미래를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결국 미국의 6자회담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은 ‘북핵 문제’ 해결에 집중했던 지금까지의 방식과 달리, 북한의 개혁ㆍ개방과 인권, 위폐 등 이른바 ‘북한 문제’ 전반을 한 바구니에 넣어 함께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2년 2차 북핵 위기 발발 당시 당시 라이스 안보보좌관이 주장했던 ‘대담한 접근법(bold approach)’으로, 라이스의 국무장관 취임과 함께 다시 등장한 셈이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지난해 경수로 문제 등이 거론된 9ㆍ19 공동성명을 받아들인 이유도 종전의 현상유지 태도를 접고, 한반도와 동북아 냉전구도의 해체라는 ‘현상 변경’을 구상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한편 ‘대담한 접근법’은 과거 서방이 옛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자유와 인권문제로 압박해 체제를 무너뜨렸던 전략으로 ‘헬싱키 방식’으로도 불린다.

특히 라이스 국무장관을 비롯해 로버트 졸릭 부장관과 크리스토프 힐 차관보, 필립 젤리코 자문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대사 등 ‘헬싱키 방식’에 실무적으로 익숙한 인사들이 국무부 요직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도 미국의 전략 변화가 확인된다.

북 · 미, 9·19 공동성명 해석 달라

9ㆍ19 공동성명이 미국의 양보에 의한 결과가 아니란 점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경남대 김근식 교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9ㆍ19 공동성명의 도출이 미국에게는 북핵 문제 해결 이후에 북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며 “또 북한의 체제 변화에 대한 미국의 욕심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으로, 인권과 위폐 등의 문제 제기는 같은 맥락”이라고 풀이했다.

결국 9ㆍ19 공동성명에 대해 북한과 미국의 셈법이 다르다는 얘기다.

워싱턴 분위기에 정통한 6자회담 우리측 당국자의 전언에 따르면, 위폐 문제 논의를 위한 북·미 간 3월 7일 뉴욕 접촉에서도 미국과 북한의 해석이 상당히 달랐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이 북한의 비상설 협의체 제안에 대해 일방적으로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 당국자는 오히려 6자회담에 복귀하면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며 기존의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서는 역제안을 했는데도 북한이 거절한 것에 대해 의외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북한이 정세 판단을 잘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이는 우리측 당국자가 “9ㆍ19 성명에 북·미 관계 정상화가 나오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성명에는) 향후 관심사항도 논의하면서 해결한다고 돼 있다”고 말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편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도 ‘미묘한 한반도 정세변화’와 관련 “한미 간에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 밝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여하튼 미국의 이러한 ‘대담한 접근법’은 큰 계기가 없는 한 수정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1월 중간선거에서 현재 지지율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부시 진영은 보수층 결집을 위해서라도 인권 문제나 폭정 타도 등 ‘도덕 정치’의 깃발을 쉽게 내릴 수 없다. 따라서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미국의 북한에 대한 채찍은 강도를 높여갈 것이란 게 일반적 전망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북한의 선택은 ‘버티기’와 ‘선수치기’ 중 양자택일이다.

현재 북한은 김 위원장에 이은 장성택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중국 방문을 통해 미국의 대북한 적대 정책 비켜서기와 대중국 협력 강화 등 이중적 행보로 ‘버티기’ 전술을 구사하고 있지만 별로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결국 ‘선수치기’가 돌파구라는 얘기다. 우선 6자회담의 즉각적인 복귀가 당장 얻을 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한국이나 중국에게 중재할 기회를 줘 북·미 양자대결 양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밖에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전격 개최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국내 대북 전문가들의 견해다. 4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의 방미 전후로 나올 법한 평양의 결단이 주목된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