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측근 비리·추문 끊이지 않아… 정치인생 최대 위기

▲ 천수이볜 대만 총통.
요즘 대만 언론들은 추문에 휩싸인 대만 정치권을 높은 도덕률을 요구하는 한국정치에 빗대 비판하고 있다.

한 TV 프로는 “한국에선 현대차가 재산의 사회환원에도 불구하고 사법의 심판을 받고 있고, 총리는 기업인과 골프를 친 탓에 사임했다”고 소개했다. 또다른 한류(韓流)가 형성된 셈인데 이런 사정 뒤에는 어물쩍 넘어가는 대만의 정치 풍토가 있다.

대만에선 덮으면 불거지는 비리와 추문이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속 시원한 조사도 없이 묻히는 의혹은 결국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의 입지를 좁혀 놓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사면초가인 천 총통은 마침내 사위가 비리로 구속되자 정부 운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그의 권력은 쑤전창(蘇貞昌) 행정원장에게 이양됐다.

천 총통의 불명예 퇴진을 가져온 것은 지난해 말부터 터져나온 가족과 측근의 비리. 의사인 사위 자오젠밍은 지난달 24일 주식 내부자거래로 거액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대만 역사에서 총통 가족이 구속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부마’로 불리는 자오의 친가로 확대된 수사에서 이들은 사전 취득한 정보로 주식에 투자해 8배의 이익을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자오의 부친은 4개 회사의 고문으로 위촉돼 매달 1,000만원이 넘는 거마비를 받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야당은 물론 집권 민진당 내에서도 거센 비판이 제기되고, 천 총통의 지지율은 집권 이후 최저인 한 자리 수로 떨어졌다.

비난화살을 피하기 위해 천 총통은 사돈 일가를 비난하며, 임신 8개월의 딸의 이혼카드마저 꺼내 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천 총통은 결국 권력이양을 선택했지만 비리와 추문은 끊이지 않고 있어 그의 정치행로에 뇌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족과 측근들은 각종 기업합병과 공기업 경영에 간여하고 내부자 거래로 큰 이익을 챙겼다는 추문이 지난해부터 계속됐지만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부인 우수전(陳水扁) 여사의 경우 한화 2억6,000만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을 뇌물로 받고 공기업 인사에 간여했으며, 백지신탁을 하지 않고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큰 차익을 얻었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인 우 여사는 깨끗한 이미지로 민주 영부인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경영권 분쟁 중인 백화점의 한쪽 당사자로부터 상품권을 받았다는 대만판 옷 로비 사건은 여러 정황에도 불구하고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이밖에 최근에는 국립과학위원회 부의장이 공사계약에서 불법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체포됐고, 국방부에선 총통 비서장실 근무경력을 지닌 한 군장성이 내부거래에 연루돼 조사를 받고 있다.

이번 천 총통의 막후 퇴진에 대해서도 대만 언론들은 정서적인 면에서 국민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천 총통은 국민이 바라는 유감 표명은 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여러 의혹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나오길 기대했지만 이마저 천 총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가족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생활하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다.

총통의 사임을 주장해온 야당은 여전히 비등한 여론을 업고 의회의 3분의 2의 지지를 통해 천 총통 탄핵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는 구상을 하고 있다.

야당은 전체 225석 가운데 130석을 차지하고 있고, 여기에 여당 민진당 의원 30명 이상이 동조하고 있어 가결될 가능성도 있다. 민진당에선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지지율이 바닥인 천 총통을 출당시키고 다음 선거를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정가 모습과 함께 2008년까지 임기를 2년 넘게 남긴 천 총통이 실권을 놓으면서 대만정치권에 레임덕 현상이 나타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앞으로 대만 내각의 통제는 쑤 행정원장이 행사하게 되고, 천 총통은 헌법상 권한만 지니게 된다. 천 총통은 정부운영뿐 아니라 선거운동을 포함한 집권 민진당의 일에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만 자신은 헌법에서 부여된 명목상의 권한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대만 언론들은 외교권과 군통수권,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것으로 좁혀 해석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대만헌법이 총통체인지 행정원장제인지 규정이 명확하지 않다”면서 “이전 몇몇 행정원장들은 총통의 비서실장처럼 행동하며 그의 지시대로만 움직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큰 권한을 행사했다”고 소개했다.

쑤 행정원장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대만 언론들은 쑤 행정원장이 100% 천 총통의 사람일 수 있다면서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때문에 일부에선 천 총통이 형식적 권력이양을 했을 뿐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천 총통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런 시각이 결코 지나치진 것은 아니다.

대만출신의 첫 총통인 천수이볜은 사실 역경을 기회로 삼아 일어선 정치이다.

1951년 남부 가난한 농촌에서 자란 그는 대만국립대를 거쳐 변호사가 된다. 부유한 의사 집안의 딸인 우수전과 결혼한 야망의 변호사는 80년대 초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반체제인사 황신제 등의 변론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한다.

소송에는 졌지만 그는 변론한 피고인들과 함께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야당 민진당의 핵심 세력에 진입하게 된다.

▲ 우수전(왼쪽) 여사와 딸의 결혼사진. 사위 자오젠밍도 구속됐다.

85년 부인 우 여사가 트럭에 치여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일반인들은 사건이 천 총통을 암살하려는 음모라는 믿음이 강했다. 이듬해 천 총통은 당시 집권당인 국민당의 명예훼손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8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런 고초를 딛은 그는 타이베이 시의원을 거쳐 94년 첫 타이베이 시장에 선출돼 본격적인 정치가도를 달린다. 시장 시절 그는 부패를 척결하고 윤락가를 없앴으며 교통체증을 풀고 거대한 슬럼가를 공원으로 조성했다. 그러나 화합하지 못하는 성격과 독재적인 스타일은 많은 적을 만들어냈다.

정적들의 반대로 4년 뒤 시장선거에 패배했지만 그는 이를 기회로 활용해 2000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의 리덩후이(李登輝)를 누르고 당선된다. 이듬해에는 총선마저 승리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시대를 연 국민당의 일당독재에 마침표를 찍었다.

대만독립 추진 등을 통해 중국, 미국과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대만 국민들은 그의 역동적인 모습과 입지전적 인생에 마음이 움직여 그에게 친구라는 뜻의 ‘아-볜’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는 이런 대중의 마음을 잘 읽는 포퓰리스트 성향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일례로 대중집회에서 그의 연설은 대중을 웃기는 것은 물론 풍선과 불꽃 음악까지 동원해 일종의 쇼를 연출해낸다. 그런 덕분인지 2004년에는 근소한 차이로 재선에도 성공했다.

당시 TV토론에서 상대 후보가 그를 향해 “변덕스럽고 무책임하며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다 그는 “나의 헤어스타일은 수년간 변한 적이 없는데 부인에 대한 사랑도 그러하다”고 받아 넘겼다.

불명예 퇴진 국면에서 권력을 내놓은 천 총통이 이번 인생 최대의 위기를 어떤 기회로 삼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