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지성' 노암 촘스키 교수, 새 책 '실패한 국가'서 미국 맹비난… "세계가 미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경고

▲ 노암 촘스키
미군 해병대의 이라크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이 거센 와중에 ‘미국의 깨어있는 지성’으로 꼽히는 노암 촘스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교수가 “미국은 실패한 국가”라고 못박았다.

지난달 발간된 촘스키의 새책 '실패한 국가(Failed States):권력의 남용과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Metropolitan Books)은 국제무대에서 고립되고 자국민조차 등을 돌리고 있는 미 정부의 독단을 방대한 자료와 미디어 분석을 통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거울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힘겹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밝힌 촘스키의 새 책을 요약해 소개한다.

실패한 나라의 세가지 특징

핵 전쟁, 자연 재해,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미국)가 지구적 재앙을 늘려가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현재의 양상은 인류의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한다.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대부분 국민이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딜레마는 이 거대한 나라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시스템이 실패한 국가의 특성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미국인, 그리고 전 인류가 고심하게 된다.

실패한 국가는 공통적으로 실패한 시스템을 지녔다. 미국이 인류의 안보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거나(이라크) 내부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나라(아이티) 등은 모두 실패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

국제정치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가 "좌절스럽게도 부정확하다"는 전제 아래 도출해낸 실패한 나라들의 특징은 세 가지다.

▦국민을 보호할 능력ㆍ의지가 부족하고 ▦자국만은 법 테두리를 벗어나도 된다는 독단에 휩싸여 있으며 ▦민주 제도 자체를 뒤흔들 정도로 민주주의가 결핍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모습을 정직하게 살핀다면, 금세 이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라크에 건설하려는 일그러진 민주주의

자국의 민주주의는 심하게 일그러진 상태이면서 "어려운 나라에 민주주의를 전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미국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미국이 전파하겠다고 외치는 민주주의는 온전한 형태조차 아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보이고 있는 태도가 전형적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독립을 돕는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이익을 해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를 달아두었다.

이는 이라크가 민주적인 독립국가 지위를 얻지만 명백한 한계를 지닐 것임을 뜻한다. 구 소련이 '위성 국가' 형식으로 연방 국가에게 '무늬만 독립'을 부여했던 것이나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국에게 베푸는 척 했던 어긋난 독립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의 이익'이란 단서는 결과적으로 이라크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담 후세인에 반발해온 비폭력적인 이라크 저항세력은 미군의 이라크 점령 초기 미국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앞서나간 형태의 민주주의 구상을 내놓았다.

미국은 경악했다. 독립적이고 튼실한 무슬림 시아파 정부가 들어서 이란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나아가 미국에 공급하는 석유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사우디 아라비아까지 합류한 '시아파 연대 가능성'이 못마땅했던 탓이다.

'미국의 이익'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미 정부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구상을 거절하고 자체적인 민주주의 건설에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위에 있는 워싱턴

이란의 우라늄 농축 연구를 둘러싼 논란은 미국의 독단을 나타내는 집약체다.

이란의 우라늄 농축 연구 자체를 ‘핵무기 개발용’이라고 비난하면서 이스라엘 핵무기에 대해서는 국제적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는 이중적 태도는 ‘워싱턴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준수를 거부한다’는 것과 다름 없다.

▲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 미국은 이란의 우라늄농축 연구를 반대하면서 이스라엘 핵무기에 대해선 침묵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란 사태는 1981년 이스라엘의 이라크 우라늄 농축 시설 폭격 후 사담 후세인의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이 시작됐던 과거에 빗댈 수 있다. 결국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이다.

즉 이란에 대한 공격 조짐만으로도 이라크 시아파_이란 정부_사우디아라비아 시아파가 연합한 폭력적인 반미 연대가 형성돼 더 많은 희생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

핵무기 확산과 관련해 "국제법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태도는 미국에 의해 인도에까지 전염됐다. 이란과 200억달러에 달하는 천연가스 계약 건을 추진하고 있던 인도는 한때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이란에 힘을 실어주려고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미국은 "(미국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인도가 NPT와 상관없이 추진하고 있는) 인도의 핵 개발을 끝내고 싶은가"라고 협박함으로써 인도를 '반(反) 이란 그룹'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팔레스타인 선거

올해 1월 실시한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드러난 미국의 태도 역시 민주주의 자체를 부인하는 듯하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사망(2004년 11월)할 때까지는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총선 실시조차 허락치 않던 조지 W 부시 정부는 미국이 선호하는 집권 파타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하다는 기대 아래 총선 절차에 착수했다.

유세 과정서 과격 이슬람 단체인 하마스의 인기가 치솟자 워싱턴은 '보이지 않는 선로'를 통해 파타당 후원에 나섰다. 여기에는 파타당에 대한 유권자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200만 달러 어치의 '신속한 프로젝트 수십개'가 포함돼 있었다.

불법 선거에 가까운, 이 같은 노력에도 총선은 하마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미국과 이스라엘은 싫건 좋건 이스라엘의 존재를 거부하는 하마스와 상대해야 한다. 미국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존재할 권리'를 부인한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미국이 팔레스타인의 '존재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과 평행선을 긋는 입장이다.

남미와 중국 : 미국서 떨어져 나가는 세계

미국의 갖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다. 그 중 특히 미국을 제외한 채 중국을 중심 축으로 형성되고 있는 '에너지 연대'가 미 정부를 초조하게 하는 분위기다.

유럽과 달리 미국의 요구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중국은 미국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란과 긴밀한 관계다. 이란의 석유 중 상당량은 이미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고 중국은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식이다.

아직은 미국의 우방이라 여겨지는 사우디도 중국과 손을 잡았다. 지난해 사우디는 중국 석유 수입의 17%를 차지했으며 올해 1월 사우디 압둘라 국왕이 베이징(北京)을 찾아 "석유, 천연가스, 광물에 대한 협력과 투자의 확대"를 약속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과 무관한 에너지 정책을 펴고, 여기에 한국, 일본 등 아시아권이 합류한 '아시아 에너지 안보망'이 구축될 가능성도 커진다.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등 남미 국가들도 미국 대신 중국으로 눈길을 돌리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입장 차이로 미국과 반목하고 있는 캐나다까지 "미국으로 보내던 석유의 4분의 1을 수년 안에 중국으로 수출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등 미국의 고립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추세다.

아직 남아있는 기회라도 반드시 잡아야

미 정부의 가장 큰 약점은 문제와 대안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있다.

지금의 위기를 맞기 전에 수많은 조언이 이미 제기됐는데 1) 국제형사재판소와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을 받을 것 2) 교토 의정서 서명과 이행 3) 국제적 문제는 유엔에게 위임하는 자세 4) 테러 위협을 폭력이 아닌 외교와 경제로 해결 5) 유엔 헌장 정신 수호 6) 유엔 안정보장이사회에서의 거부권 남용 중단 7) 군사 예산 삭감 및 복지 예산 증액 등이 대표적이다.

미 정부에 대한 요구의 근본에는 국민의 뜻을 따르라는 민주주의 기본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정보를 차단한 채 주요 이슈에 대한 국민의 여론 형성 자체를 방해하는 '민주주의의 결핍'이 국가를 실패의 나락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미 정부는 알아야 한다.

다행히 미 국민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는 확고하며 정신 자체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실패한 국가'로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기회가 아직 많이 남아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기회들을 잡지 못한다면, 미국은 물론 세계와 미래 세대에까지 재앙적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