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자주독립의 기수, 反美·非美 성향 7개국 순방 등 야심찬 정치적 행보

북한 미사일 문제와 중동분쟁으로 숨가빴던 지난달 국제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정치적 행보를 야심차게 전개한 지도자가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다. 국제적 이목이 없었다기보다 그의 행보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만큼 정치·경제적 국제상황이 베네수엘라 정부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차베스 대통령이 이런 국제기류를 간파하고 있었다면 그에게 반미만 무조건적으로 외치는 좌파 선동가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단견일 가능성이 크다. 감정적 포퓰리즘적 언사보다는 전략적 행보가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심상치 않은 외교행보의 첫 무대는 7월 21일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에서 폐막된 ‘메르코수르(Mercosur 남미공동시장) 정상회의다. 안데스공동체와 함께 중남미의 양대 경제블록의 하나인 메르코수르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베네수엘라를 처음 가족으로 맞이했다.

안데스공동체를 탈퇴하고 7월 4일 메르코수르에 정식 가입한 차베스 대통령의 데뷔 무대였다. 베네수엘라의 가입으로 메르코수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남미 3대 경제대국을 모두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역내 최대 경제블록으로 거듭났다. 반대로 콜롬비아, 페루 등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친미국가로 구성된 안데스공동체는 그만큼 위상 추락이 불가피해졌다.

메르코수르 가입 등으로 美 경제예속 벗기

베네수엘라의 메르코수르 가입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단순히 교역분야에서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5위 산유국인 베네수엘라가 최근 고유가라는 양날개까지 달아 사상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베네수엘라가 메르코수르 회원국의 자금줄 역할을 할 것이란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옵서버로 참석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번 정상회의는 경제적 의미보다 정치적, 외교적 함의가 더 컸다. 반미 좌파의 기수 차베스 대통령이 자원대국이라는 경제적 위상을 앞세워 ‘중남미의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무대로 이용할 것이라는 점에서였다.

차베스 대통령이 개회식 연설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고 한 데 반해 “메르코수르가 원래 목적인 자유무역과는 멀어지는 대신 미국에 맞서는 정치적 결사체의 성격을 강화할 것”이라고 비판한 미국의 민간 싱크탱크의 대조적인 평가가 이를 말해준다.

메르코수르의 ‘재탄생’을 주도한 차베스 대통령은 정상회의를 마친 뒤 러시아, 이란, 벨로루시, 카타르, 베트남 등 최소 7개국을 순방하는 ‘월드 투어’에 들어갔다. 국가적 자신감이 한껏 배어있는 외교 스케줄이다. 특히 미국이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국가들이 순방에 대거 포함된 것이 관심을 끌었다.

콘돌리사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비난했던 벨로루시, 핵 프로그램으로 미국과의 전쟁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이란, 노골적인 민족주의 패권경쟁으로 미국과 ‘신냉전’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 등이 이들 나라들이다. 막판에 일정에서 뺐지만 북한도 방문할 용의가 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번 순방의 저변에 깔려 있는 차베스 대통령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국제적 ‘반미 벨트’를 형성해 보겠다는 것이다.

▲ 베네수엘라군이 독립기념일 기념 퍼레이드에서 러시아제 AK소총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은 러시아로부터 10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구매하기로 했다. / AP

차베스 대통령은 모스크바에서 수호이-30 전투기 30대, 헬기 30대 등 10억 달러에 달하는 군 항공기 구매 계약을 비롯, 수 건의 주요 무기 도입 협정을 맺었다. 러시아제 칼리니스코프 소총 10만정과 자국 내 칼리시니코프 소총 제조창 건설도 추진중이다.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에서는 미국이 ‘유럽 최후의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과 에너지 분야를 포함한 7건의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협정과는 별개로 “벨로루시는 형제이자 친구”, “벨로루시에서 베네수엘라가 시작했던 것과 같은 사회주의 모델 국가를 본다” 는 등 노골적으로 미국의 심기를 긁는 발언을 거듭했다.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야심

그렇다고 이번 순방이 차베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돈보따리를 풀고 정치적 명분을 과시하는 이벤트로만 생각해서는 오산이다.

차베스 대통령이 월드 투어에서 챙기고자 하는 실리 카드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10월 결정되는, 중남미에 한 자리가 돌아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 자리이다. 미국은 과테말라를 공개 지지하며 베네수엘라의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결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차베스의 대통령의 이번 대륙별 순방은 전 세계를 무대로 미국과 맞장을 뜨는 외교전인 셈이다.

차베스 대통령의 남미 민족주의 노선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남미은행’의 설립이다.

지난해 9월 차베스 대통령은 석유자원을 기반으로 국제 금융기구를 대체할 중남미 자체 조달원으로서의 남미은행 설립 의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바 있다. 미국의 경제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미국이 좌지우지하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판단에서다.

그 첫 단계로 베네수엘라는 지난달 26일 아르헨티나와 공동으로 20억 달러 규모의 ‘남미 채권’을 오는 9월 중 발행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중남미 지역에서는 처음인 공동 채권 발행은 남미은행 설립을 위한 본격적인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는 베네수엘라가,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 남미 각국의 채권을 대규모로 매입하고 있는 가운데 추진되는 것이어서 그 강도가 예사롭지 않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막대한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31억 달러에 달하는 아르헨티나 국채를 집중 매입해 왔다.

전문가들은 차베스 대통령의 좌파 민족주의 외교를 고유가가 초래한 ‘석유정치학’의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다. 베네수엘라와 이란의 경우에서 보듯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도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석유정치에 맞서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에 강력한 군사적 경제적 조치를 취하기 어려운 것은 이들 국가가 갖고 있는 엄청난 자원의 힘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의 폭발적인 에너지 수요 증가와 역시 에너지 자원 강국인 러시아의 등장으로 석유정치학의 위력은 갈수록 더해질 수 밖에 없다.

최근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좌초된 것도 미국 주도의 세계화,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들어 온 차베스 대통령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조건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공수부대 중령 출신으로 한차례의 쿠데타 실패 끝에 1998년 권좌에 오른 차베스 대통령. 2002년 반(反)차베스 쿠데타를 정면 돌파하고 더욱 권력을 공고히 하고 있는 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인 야구의 광적인 팬이다.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군에 입대할 정도였으며, 소원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는 그가 앞으로 어떤 남미를 그려나갈지 흥미롭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