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임시이양 전격 발표, 집단지도체제 전망 속 미국 정치공작 여부가 변수

‘카스트로 없는 쿠바.’

생각하기도 힘든 가설이지만 이제는 가정일 수만은 없게 됐다.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전격적인 권력 임시이양 발표로 쿠바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쿠바가 곧 카스트로이고, 카스트로는 쿠바를 상징할 정도로 그의 위상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이번 권력이양 발표는 충격적이었다. 카스트로의 퇴장은 단순히 한 사람의 반미 지도자가 사라졌다는 것 외에도 공산주의 혁명 1세대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소멸된다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내포한다.

특히 쿠바를 서반구의 유일한 공산국가로, 그것도 자본주의의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턱밑에서 47년간 꿋꿋이 권좌를 유지시켜 왔다는 점에서 카스트로가 갖는 좌파적 의미는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피델 카스트로의 권력 임시이양은 전격적이었지만 치밀하게 발표됐다. 지난달 31일 카스트로 의장은 카를로스 발렌시아 비서실장이 국영TV를 통해 대신 발표한 포고문에서 “최근 아르헨티나와 쿠바 동부를 방문하면서 생긴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로 출혈 증세를 보여 수술을 받았다”며 “몇 주간 휴식이 필요하며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 국방장관에게 일시적으로 이양한다”고 밝혔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권좌에 오른 이래 60년대 미국의 피그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숱한 난관을 헤쳐오며 세계 최장기 집권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선 그가 잠시동안만이라도 권력을 이양한 것은 그의 반세기 집권 기간 중 처음 있는 일이다.

카스트로는 권력 이양과 함께 13일로 예정된 80세 생일 축하행사를 쿠바 혁명군 50주년인 12월 2일로 연기해 줄 것도 요청했다. 장문의 포고문에는 국가평의회 의장 등 핵심 요직의 위임 외에도 보건, 교육, 에너지 부문의 수장으로서의 임무도 넘긴다는 내용이 더 많은 분량으로 포함돼 있어 여러모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신의 직책이 평의회 의장, 공산당 제1서기, 군 최고사령관에 그치지 않고 국가 주요 사안을 직접 진두지휘한 ‘현장 지도자’라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그런 만큼 카스트로는 포고문에서 자신을 대신해 세 부문의 프로그램을 추진해 나갈 인물의 직책과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번 포고문에 거론된 인물들을 통해 카스트로의 후계구도는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친동생이자 97년 제5차 공산당 대회에서 카스트로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라울 카스트로(75) 국방장관이 평의회 의장, 공산당 제1서기, 군 최고사령관 직을 대행하게 됐다.

3개 프로그램 기금 관리 책임자에는 카를로스 라헤 국가평의회 부의장, 펠리페 페레스 로케 외무장관 등 공산당 정치국 위원, 국가평의회 위원 등이 지목됐다.

공식 후계자 라울 카스트로, 권좌유지 취약

그러면 라울에게 권력이 임시 이양된 쿠바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10년 가까이 공식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라울이 실제 어느 정도의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느냐가 이 물음에 대한 열쇠다.

일단은 라울의 권력이 형의 권좌를 그대로 이어받기에는 여러모로 취약하다는 게 중론이다. 카스트로의 권력 이양 발표 이후에도 카스트로의 쾌유를 바라는 언론보도는 넘치는 반면, 최고지도자로 등장한 라울의 동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것이 작지만 의미있는 단면이다. 또 라울 역시 고령이라는 점도 부담이다.

따라서 ‘포스트-카스트로’는 라헤 부의장, 로케 외무장관 등 상당수의 후계자군이 모두 참여하는 집단지도체제로 꾸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물론, 카스트로가 이번 발표로 완전히 권력무대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다. 포고문에서 ‘임시’라는 말을 수차 언급한 것처럼 카스트로는 건강상태가 안정되는 대로 권좌에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것은 카스트로가 80줄에 접어든 고령에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에서다.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의 의료 전문가들은 결장암, 탈장류의 헤르니아 혹은 혈관 조직의 기능 장애가 장출혈의 원인일 수 있다며 고령의 노인에게는 어떤 종류의 개복수술도 위중할 수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과거처럼 막강한 카리스마를 휘두르기에는 시간은 더이상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카스트로가 언제 복귀하든 쿠바 지도부의 세대교체는 속도가 문제될 뿐 불가피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쿠바의 권력 이양기에 어떤 정치공작을 벌이느냐도 중요한 변수다.

미국 언론들은 카스트로의 1인 장기집권 체제는 머지 않아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이 카스트로 공산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이유로 “라울과의 관계개선은 없다”고 못을 박은 것도 쿠바의 민주적 정권교체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오래 전부터 카스트로 정권 붕괴에 대비해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 이 플랜의 핵심은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과 카를로스 구티에레스 상무장관을 공동의장으로 2003년 발족한 ‘자유쿠바 지원을 위한 미국위원회(USAFC)’가 마련한 ‘쿠바 국민과의 협정’이다.

이 협정은 쿠바 정부가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로 전환하도록 돕기 위해 2007~2008년 7,000만 달러를 지원한다는 게 골자다. 지난달 10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추가로 8,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승인했다. 협정에는 또 카스트로 사후의 쿠바를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각종 전략적 방안들이 담겨 있다.

USAFC가 최근 마련한 보고서는 “쿠바에서 정권이양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한 후 2주 이내에 기술적 지원 태세를 갖춰야 하며 여기에는 쿠바의 민주선거를 지원하기 위한 법 전문가들이 포함돼야 한다”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카스트로 사후 6개월이 미국의 대 쿠바 민주주의 체제 정착의 성공 여부를 결정할 고비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쿠바를 장기 통치해온 카스트로가 물러났을 경우 쿠바의 심각한 권력공백이 초래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관측은 설득력이 있다. 쿠바에서의 민주적 정권교체가 남미 반미 좌파의 맏형격인 카스트로의 퇴장과 함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주도하는 반미 좌파벨트도 자연스럽게 와해시킬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