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파·수니파 간 피의 보복전… 쿠르드족은 자치권 확대 노려 긴장 고조

2003년 5월 1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투복 차림으로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에 나타나 호기 있게 이렇게 외쳤다. “큰 전투는 끝났다.” 이라크전에 대한 승전 선언이었다. 전투기를 타고 항모에 내린 부시 대통령의 출현에 대해 당시 언론들은 군 통수권자라는 지위를 이용한 지나친 ‘깜짝 쇼’라고 비꼬았다.

3년이 흐른 지난달 21일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내전상황을 우려하고 있으며 그런 상황에 좌절감을 느낀다”고 기자회견장에서 토로했다. 미군 철군 요구에 대해서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지금 미군이 철수하는 것은 테러리스트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를 테러리스트들에게 내주는 것”이라고 피해나갔다. 3년여 동안 이라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달라진 것일까.

부시의 이라크 딜레마

지금 이라크가 내전 상황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은 정치적 수사(修辭)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부시 정권에게 이라크의 실제 상황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두 달도 남지 않은(11월 7일) 중간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선거 이슈로만 이라크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을 타도해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겠다고 하던 의욕은 기대 난망이 돼 버렸다는 뜻이다.

최근의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미국 정부의 이라크에 대한 달라진 인식이 뚜렷해진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연차총회에서 이슬람 급진파를 “파시스트와 나치, 공산주의자 등 20세기 전체주의자들의 후예”라고 부른 뒤 “미국은 민주주의 발전을 후퇴시키려는 과격 이슬람 세력에 맞선 21세기의 결정적인 이데올로기 투쟁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10일 영국발 미국행 항공기 폭파 음모가 발표된 직후에는 “이슬람 파시스트와의 전쟁”이라는 격한 표현을 써가며 처음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이념 전쟁’으로 둔갑시켰다. 나날이 추락하는 부시 정부에 대한 신뢰도, 이 상태라면 중간선거는 필패라는 절박감이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새로운 궤변을 만들어내게 한 배경이다.

2002년, 2004년 두 번의 의회선거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이란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공화당은 외부의 적에 단호히 대처하는 ‘강한 미국’으로, 민주당은 머리만 큰 ‘허약한 지식인’으로 각인되면서 공화당은 5년 동안 의회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런데 그 효자손이었던 ‘테러와의 전쟁’이 부시 정권을 옥죄는 부메랑이 되자 ‘파시스트’라는 보다 자극적인 단어를 들고 나온 것이다. 민주당으로 쏠리는 판세를 흔드는 데는 여전히 안보논리가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부시 정권의 레토릭(rhetoricㆍ 수사)은 베트남전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이 들고 나왔던 ‘도미노 이론’을 연상시킨다”며 “구체적인 계획 없이 공포심만을 조장하는 전략이 또다시 먹힐지는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파시스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화법은 눈에 띄게 허약해졌다. ‘이라크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고 앵무새처럼 되뇌던 과거와 달리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 야기될 ‘심각한 결과’를 경고하는 쪽으로 방점이 바뀌었다. 이라크가 더 이상 눈가림할 수 없는 혼미한 상황으로 치닫자 파국적 결말을 강조하는, 사실상 국민을 상대로 협박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랍족과 쿠르드족 간 분쟁으로 확전 움직임

그럼 이라크 땅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지금 이라크 바그다드의 병원은 살벌한 전쟁터로 변해있다. 시아파 무장세력들이 치료받고 있는 수니파들을 찾아내 확인 사살하려고 병원에까지 난입하고 있는 것이다.

6개월 전 차량 폭탄테러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압바스 사우드(43)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시아파 민병대원들에 의해 침상에서 끌려 나와 무참히 사살됐다. 수니파라는 이유에서였다. 종파 분쟁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된 이라크에서 병원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특히 수니파 무슬림에게 병원행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같다. 급진 시아파 성직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이끄는 정치단체 소속인 알리 알 시바리가 보건장관이 된 뒤 공립병원은 알 사드르를 추종하는 무장조직 ‘알 마흐디’군이 활개치는 전장이 됐다. 시아파 암살 특공대의 수니파 학살에 병원 직원들이 협조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수니파들은 부상을 입어도 집에서 몰래 치료 받는가 하면 덜 위험한 도시의 병원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바그다드를 탈출하는 임신부들도 나타나고 있다. 시아파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수니파인지 시아파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자치도시인 술레이마냐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귀가하는 쿠르드애국동맹(PUK) 소속 여군들. / AFP

최근에는 치안이 비교적 안정된 북부 쿠르드족 자치지역으로 탈출하는 수니파들이 늘고 있다. 종교적으로 그리 예민하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인데, 후세인의 수니파 정권에 수십년간 핍박 받았던 쿠르드족으로서는 도망쳐 들어오는 수니파들이 결코 달갑지 않은 존재여서 수니파 아랍족과 쿠르드족 간의 긴장도 점점 커지는 상황이다.

시아파의 여러 정파 간 내분도 심상치 않다. 지난달 27, 28일 바그다드 남쪽 디와니야에서는 시아파 민병대와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져 8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권력배분을 둘러싼 시아파 정치세력 간의 알력이 뿌리깊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을 보는 시각에서 편차가 크다. 2004년 미군에 대항해 두 차례 봉기를 꾀했던 알 사드르는 미군의 점령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반미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반면 현 정권의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이라크이슬람혁명최고위원회(SCIRI)’를 이끌고 있는 압둘 아지즈 알 하킴은 미국에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다와당 출신의 누리 알 말리키 총리가 각 민병대 해체를 포함한 권력 개편을 추진하고 있으나 성과는 미미하다.

이 와중에 쿠르드족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 분쟁을 이용해 자치권 확대를 시도하고 나서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일부 민족진영에서는 석유자원이 풍부한 북부지역을 토대로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달 31일 쿠르드족 자치정부가 “쿠르드족 지역의 모든 관공서와 정부기관은 이라크기 게양을 금지하고 쿠르드기를 걸어야 한다”는 포고령을 발동하자 알 말리키 총리가 “이라크 전 지역은 한곳도 빠짐없이 이라크기를 게양해야 한다”고 맞받아친 것은 종파간 분쟁이 아랍족과 쿠르드족 간의 민족 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예고한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