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Before, After - 천문학적 전쟁비용으로 국고 적자 누적, 이슬람 극단주의자 득세 빌미 줘

▲ 9·11 테러 5주년을 하루 앞둔 10일 부시 미국대통령과 로라 부시 여사가 세계 무역센터가 있던 맨해튼의 그란운드 제로를 방문, 북쪽 타워자리에 마련된 추모 조형물에 헌화하고 있다. / AFP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빠뜨렸던 9ㆍ11 테러가 11일로 5주년을 맞았다. 그 5년 사이 미국과 세계는 급변했다. 미국이 주도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으로 아프간에서는 탈레반 정권이,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졌다.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던 미국에서는 안보 논리로 무차별적인 도ㆍ감청이 횡행하면서 시민권은 극도로 위축됐다.

현대사의 기점으로 ‘Before 9ㆍ11(9ㆍ11 전)’과 ‘After 9ㆍ11(9ㆍ11 후)’이라는 신조어까지 제시될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낳았던 9ㆍ11 테러의 5년 뒤 모습을 놓고 전 세계는 다양한 각도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은 더 폐쇄적이 됐는가

30개 선진경제국으로 구성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2일 세계 각 대학의 외국인 등록률에 대한 연례 보고서를 발표했다. 2000년에서 2004년까지를 대상으로 한 보고서에서 미국 대학의 외국인 점유율은 25%에서 22%로 떨어졌다. OECD는 9ㆍ11 테러 후 미국 정부가 입국규정을 까다롭게 하고 외국인 학생 유치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뉴질랜드와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외국 학생 점유율은 1% 이상 늘어 반대급부를 얻었다. 미국과 달리 OECD 상당수 회원국들이 외국 학생들을 임시로 혹은 영구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펼친 데 따른 것이다.

2004년의 경우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4개국이 외국 유학생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은 유학생의 절대숫자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자국 학생 대비 외국인 학생의 비율은 3%로, 호주(17%) 영국(13.4%) 스위스(12.7%)에 비해 훨씬 낮았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국토안보부와 인구조사국의 통계를 인용해 9ㆍ11 이후 무슬림의 미국행 추이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한해 동안 미국에 들어온 무슬림은 4만여 명으로, 9ㆍ11 이후 연간 무슬림 입국자 수로는 최대를 기록했다. 또 지난해 9만6,000여 명의 미국 내 무슬림이 영주권자가 돼 이 역시 20년 만에 가장 많았다.

9ㆍ11 직후에는 이집트, 파키스탄, 모로코 출신의 무슬림의 미국 입국이 급감했지만 최근에는 중동, 북아프리카, 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의 미국 행이 급증하고 있다. 노동비자를 받아 미국에 들어온 사람은 닷컴 붐으로 해외인력이 가장 많이 쏟아졌던 98년보다 많았다. 미국 시민권을 받은 외국인은 98년보다 많았고, 이는 2004~2005년 1년 동안 12% 증가했다.

9ㆍ11이 낳은 신조어 ‘요새화한 미국(Fortress America)’는 실체 없는 허상이었다는 분석이다.

9ㆍ11은 미국 경제를 퇴보시켰나

9ㆍ11 직후 미국 경제는 초토화됐다. 테러에 따른 기업들의 통신망 마비로 뉴욕 증시는 9월 17일까지 폐장했다. 증시가 재개장한 날 다우지수는 7% 폭락해 하루 낙폭으로는 최대를 기록했다. 1주일 새 14%가 폭락하는 공황상태가 연출됐다. 뉴욕시만 1,000억 달러에 달하는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회복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9ㆍ11 테러 전날인 9월 10일 뉴욕 증시 종가는 9,605.51이었다. 이 지수를 회복하는데는 4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2001년 600억 달러였던 월수출액은 지난해 750억 달러로 더 늘었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당시 하루에만 1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시장에 풀었다. 0.5% 포인트의 전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1년 연말까지 2차례 금리를 인하했다. 이후에도 금리인하 기조는 계속돼 2003년까지 금리를 50년 만에 최저 수준인 1%대까지 낮췄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부자들의 배만 살찌운다는 거센 비난에도 불구, 감세를 밀어붙여 소비심리를 지탱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재정적자는 피할 수 없었다. 전비를 세금이 아닌 국고에 의존하다 보니 빌 클린턴 전임 정부가 물려준 흑자재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2003년에는 어마어마한 적자로 돌아섰다. 두 배로 늘어난 방위비 예산, 3배로 뛴 데 테러대응 비용이 주 원인이었다.

보안산업은 9ㆍ11이 가져다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화물과 여행객에 대한 국경검문, 보안조치가 강화되면서 검색기술, 생체 ID, 네트워크 보안,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 보안 관련 산업은 그야말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

보안업체의 주가는 9ㆍ11 이후 3개월 만에 3배 이상 치솟았다. 주요 공항에 폭발물 정밀 탐지장치 설비를 납품하는 캘리포니아의 ‘인비전 테크놀로지스’는 9ㆍ11 이후 주가가 무려 2,000% 이상 올랐다. 보잉,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등 대기업 군수업체들은 잇달아 보안 자회사를 설립했다.

9ㆍ11 테러의 승자는 과연 누구인가

▲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는 미 산악사단 포병부대원들이 9·11 테러 5주년을 맞아 추모 묵념을 하고 있다. / AP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아이보 달더 외교정책 선임연구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9ㆍ11 5주년 대차대조표’에서 미국과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을 최대 패자로 꼽았다. 아프간전쟁, 이라크전쟁은 좁혀보면 미국 정부와 빈 라덴 사이의 결투였지만 결투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다. 미국 정부의 실패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퇴장으로 귀결된다.

빈 라덴의 알 카에다는 9ㆍ11 테러를 성공시킴으로써 승자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알 카에다는 근거지를 잃었고 빈 라덴은 아프간에서 도망자로 전락했다.

9ㆍ11의 전리품은 ‘이슬람 지하드’, 즉 미국을 악마로 규정하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가져갔다. 동조자가 수천명에 불과했던 지하드는 9ㆍ11 테러를 계기로 ‘틈새 이념(niche ideology)’에서 일약 수백만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지하드가 발호한 데는 9ㆍ11 테러뿐 아니라 테러 이후 5년 동안 미국이 세계에 각인시킨 일방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 알 카에다가 와해됐음에도 인도네시아의 발리, 영국 런던, 스페인 마드리드 등에서 잇달아 대형 테러가 터져 나온 것은 지하드가 자생적 테러리스트의 자양분이 된 때문이다.

북한, 이란, 파키스탄, 중국 등도 9ㆍ11로 어부지리를 얻은 승자다. 지난 5년새 북한은 미국의 강력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핵 능력을 5~10배 늘렸고, 이란은 자체 핵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은 미국의 아프간전쟁을 도운 대가로 불법 군사정권에서 대 테러전 우방으로 거듭났다. 중국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휩쓸리는 동안 아시아에서 남미,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미국에 맞짱을 뜰 수 있는 거물로 부상했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