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친인척 비리로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퇴진운동 주도, 집권후 최대 위기감

지난 12일 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台北) 중심가 카이다거란(凱達格蘭) 광장. ‘동방의 진주(東方之珠 : 둥팡즈주)’로 유명한 대만의 국민가수 뤄다유(羅大佑)가 컨테이너 가설 무대 위에 올랐다. 그는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퇴진을 요구하며 야간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는 수만 명의 시위 군중을 격려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뤄다유는 ‘밤비 속의 꽃(雨夜花)’과 ‘녹색 섬의 소야곡(綠島小夜曲)’을 잇달아 불렀다. 광장은 합창 소리로 뒤덮였다. 광장 너머 총통부 관저의 천수이볜에게 이 합창은 영낙없는 초나라 노래소리였을 것이다.

천수이볜은 현재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여 있다. 10%대까지 떨어진 지지도는 날개를 잃은 채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정치 초년병 시절 천수이볜에게 지지자들은 ‘아볜(阿扁)’이란 애칭을 붙여줬다. 아볜의 민중성은 노신(魯迅)의 소설 『아큐정전(阿Q正傳)』의 주인공의 호칭이 ‘아큐’였음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 된다. 노사모가 노무현 대통령을 노짱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제 대만 민중에게 아볜은 ‘너무 먼 당신’이다.

연좌시위를 주도하는 이는 전 민진당 주석 스밍더(施明德)다. 올해 65세인 그는 25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대만 민주화 운동의 본격적 출발을 알린 1979년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 때 반란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현 부총통 뤼슈롄(呂秀蓮) 등 다른 연루자들이 8~12년의 유기징역형을 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만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상징적 존재다.

천수이볜과 현 행정원장 쑤전창(蘇貞昌), 전 행정원장 셰창팅(謝長廷)은 모두 메이리다오 사건 변호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과거 천수이볜의 ‘인생 향도’가 던진 오늘의 지침은 간단하다. “샤타이(下台).” 불퇴전의 민주화 투사는 천 총통이 퇴진하지 않는 한 연좌시위를 출퇴근식으로 2008년 5월 20일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한다고 선언했다.

등 돌린 리덩후이 전 총통… 사면초가에

‘대만공화국의 모세’를 자임하며 출중국(出中國)을 선도하고 있는 전 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천 총통에 등을 돌린 지도 이미 오래됐다. 2000년 총통 천수이볜 탄생의 실질적 산파 역할을 했던 대만 정계의 ‘호메이니’ 리덩후이는 이제 대만의 덩샤오핑(鄧小平)이 되고자 일본 방문마저 취소했다.

그가 던진 패는 ‘뤼슈롄 총통-왕진핑(王金平) 행정원장’이다. 국민당 출신의 왕진핑을 끌어 오기 위해서는 뤼슈롄이 2008년 총통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게 리덩후이 구상의 핵심이다.

뤼슈롄과 왕진핑은 모두 내성인(內省人)이다. 내성인 총통 승계를 위해 소속당을 배신한 리덩후이에게 천 총통은 이제 단지 안전하게 해체할 불발탄일 뿐이다. 뤼슈롄 부총통 본심은 8월 29일 아주주간(亞洲週刊)과의 회견에서 한 “나는 총통직을 담당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는 발언에 담겨 있다. 민진당도 ‘천수이볜과 관계를 끊어 살길을 도모하자(斷扁求生)’를 당론으로 정했다.

천 총통은 비상한 두뇌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깡촌의 일용잡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만대학 상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반체제 인사 황신제(黃信介)의 연설을 듣고 법학으로 전과했다. 법학과 3학년 재학 중에 법률고시(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최연소에, 더욱이 수석이었다. 반체제 인사의 변호를 맡으며 정치에 입문한 그에게 투옥과 낙선 등 좌절이 기다렸다.

하지만 실패 뒤에 더 큰 성취를 이룩했다. 1985년 고향인 타이난(台南) 현장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9년 뒤인 94년 수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당선, 화려하게 재기했다. 4년 후인 98년에 시장 재선에 실패한 그는 2년 만인 2000년 총통선거에서 승리했다. 반세기 만의 정권교체를 실현시켰다.

2004년에는 롄잔(連戰)-쑹추위(宋楚瑜) 카드를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일 바로 하루 전 미스터리 저격사건이 불러일으킨 ‘탄풍(彈風)’이 극적인 막판 뒤집기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양안문제를 이슈화하여 경제실정으로 인한 20%의 지지도 격차를 야금야금 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무엇이 ‘대만의 아들’ 을 이 지경에 빠뜨렸는가.

천 총통이 현재 처한 난국의 밑바탕에는 누적된 경제실정이 자리잡고 있다. 그가 집권한 이후 대만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른 강한 원심력이 근본원인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이에 정면대결하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데 있다. 지지자들도 인내심을 잃었다.

그럴수록 천 총통은 벼랑 끝 독립행보에 매달렸다. 급기야 중국은 2005년 3월 유사시 대만에 대한 무력침공을 합법화한 ‘반(反) 분열법’을 통과시켰다.

천수이볜의 아슬아슬한 ‘독립 곡예’에 현기증을 느낀 미국도 올해 5월 중국마저 묵인해 온 그의 미국 본토 통과방문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는 아랍 에미리트를 경유지로 하는 방식으로 이에 응수했다. 미국에 “노(NO)”할 수 있는 지도자임을 과시한 것이다. 내려가던 지지율이 반등하는 순간, 사위와 부인의 비리가 터져 나왔다.

경제 실정·가족 비리 등이 '불씨'

사위 자오젠밍(趙建銘)은 주식 내부자 거래를 통해 4억 대만달러(약 118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5월 25일 구속됐다. 정보의 대가는 인사 개입이었다.

자오의 매관(賣官)은 퍼스트 레이디 우수전(吳淑珍) 여사의 880만 대만달러(2억 6,000만원) 상당의 상품권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불러일으켰다. 사위로 인해 총통사저가 압수수색당한 데 이어 총통부인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천수이볜은 이제 불명예 분야에서도 새로운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비리의 도미노가 넘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최측근 천저난(陳哲男)의 제주도 도박사건이었다. 전 총통부 부비서장인 그가 업자에게서 카지노 접대를 받은 것은 태국 노동자 개방 등 이권을 부여한 데 대한 보답 차원이었다.

‘왕의 남자’에게서 시작된 도미노 행진은 사위를 쓰러뜨린 데 이어 부인을 흔들고 마침내 총통 자신에게로 미쳤다. 판공비 3, 600만 대만달러를 불법적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총체적 모럴 해저드다.

타고난 역전의 승부사 천수이볜은 물론 팔짱만 끼고 있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의 전략이 잘 통하지 않는다. 여야 대립 구도로 몰고 가려 하지만 국민당 주석 마잉주(馬英九)는 연좌시위에 일정하게 거리를 둠으로써 그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고 있다.

11일에는 중국의 ‘공적’ 인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찬양하고 일본과의 군사동맹 운운했다. 중국으로부터의 메아리는 격분이 아닌 위로였다. 대만에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총통의 오추마’가 달리지 않는 것이다.

▲ 천수이볜 총통과 부인 우수전 여사.

우수전 여사는 1985년 국민당의 정치테러로 의심되는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천 총통은 공식행사에서 휠체어의 부인을 안아 자리에 앉게 한 뒤 “무겁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좌중을 숙연케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수전은 이제 감당하기 힘든 정치적 짐이 되었다.

초패왕은 노래 소리에 권토중래 대신 자결을 선택했다. 하지만 ‘아볜’ 은 여전히 ‘내 사전에 사임이란 없다’란 자세다. ‘아볜’은 위기의 강을 건널 수 있을까. 또 우수전을 안고 갈까.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